[사설]날치기 사과 주저하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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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이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에 대한 사과 문제를 놓고 며칠째 왔다갔다 하고 있다.

보도를 보면 날치기와 '밀약설' 유포에 대해 서영훈(徐英勳)대표가 유감 표명 기자회견을 계획했다가 두 차례나 취소했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일단 사과키로 마음 먹었으면 진솔하게 사과하는 게 옳은 태도요, 바른 수순이라고 본다. 앞뒤 재가며 눈치보며 사과한다면 그게 무슨 진정한 사과인가.

사과를 해봤자 강경 일변도의 한나라당 때문에 꼬인 정국이 풀릴 것 같지 않아 취소했다는 구구한 설명이다. 사실 소수 여당 민주당의 입장이 딱하긴 하다.

한나라당은 날이 갈수록 강경해져 사과에다 국회법 개정안 원천무효까지 요구하고 있다.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완강함이 깔려 있는 것이다. 들어주자니 '동반자' 자민련이 토라질 태세다. 자민련과 합세해 단독국회 운영을 시도하고 있지만 과반수에 찰랑거리는 숫자로는 뜻대로 굴러가지 않고 이만섭(李萬燮)국회의장마저 버티고 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정도를 걷는 게 순리다. 이번 사태의 단초는 날치기며, 날치기는 누가 뭐래도 잘못이다. 이에 대해 명백하게 사과부터 하는 게 경색정국을 푸는 실마리라 하겠다. 徐대표는 "한나라당이 국회법 개정안 반대 당론을 바꾸지 않는 한 (사과를)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사과에 전제조건을 단 자체도 어색하지만 일의 순서에도 맞지 않는다.

대통령의 유감 표명 직후 민주당의 사과가 이어졌더라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를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으나, 민주당이 오히려 야당측에 사과하라고 윽박질러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물론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한나라당의 태도에도 문제는 많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결자해지(結者解之)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민주당이 사과하려 했다는 자체는 이미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뒤 잴 일이 아니다.

먼저 잘못했노라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확실하게 약속한 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야당과 대화에 나서는 게 정치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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