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어머니의 성소(聖所)'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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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님도 와

제 모습 비춰 보는 걸

- 고진하(47) '어머니의 성소(聖所)' 중

장독대는 입맛 나는 밥상을 차려줄 뿐만 아니라 안녕과 행복을 쌓아두는 어머니의 제단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항아리들 속에서 갖가지의 장맛이 익어가는 동안 햇볕을 쬐고 비를 가려주고…, 새벽에는 정한수 떠놓고 비는 어머니의 성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앵두나무며 도라지꽃이 피는 넓은 뒤안의 장독대는 보기 어려워졌지만 고진하의 눈에는 거기 팔순 어머니와 햇님.달님의 거울이 반짝이고 있거니….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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