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부실규모만 따지다 종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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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평소 교분이 있는 어느 대형 은행 이사를 만났다.

"제가 이사이니 그래도 우리 은행 실상을 잘 알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부실채권 때문에 올해 3천억원 정도의 손실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말 발표를 보니 우리 은행은 추정손실이 없더라고요. 다른 은행들도 의아했을 겁니다. 아마 각 은행의 발표된 추정손실에 2천억~3천억원씩은 보태어 생각하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

최근 정부(91조원)와 민간전문가(1백20조원).해외신용평가기관(1백40조원)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금융부실 논쟁은 "구조조정 지연으로 부실이 더욱 심해져 또다른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는지 모른다" 는 시장 불안에 비해 너무 한가한 것 같다.

정부가 "남아 있는 부실은 크지 않다" 고 말하고 싶은 점은 이해된다. 불필요하게 시장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 또 개각을 앞두고 경제관료들이 '명예롭게 퇴진' 하고 싶은 바람 등은 어찌 보면 '인간적' 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부는 투명하고 합리적 기준으로 개별 금융기관과 금융부문 전체의 부실 규모를 밝혀야 할 것이다.

부실 규모 자체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밝혀져야 금융부실의 심각성(그리고 소요 공적자금)에 관해 정부와 시장 간에 엄존하는 인식 차가 좁혀질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구조개혁에 대한 정부 의지를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장의 뿌리깊은 불신을 덜 수 없고, 지금의 관료들이 한국경제의 총체적 구조개혁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를 통해 뼈저리게 배운 게 하나 있다. "부실을 안고 불경기를 맞는 것은 기름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격" 이라는 점이다.

국책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 "올해말이면 성장률이 5%대로 떨어진다" 며 만일 그때까지 부실해소와 구조조정을 끝내지 않으면 그 후 경기가 급랭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이상 부실 규모 '타령' 할 시간이 없다. 공적자금의 조속한 투입으로 구조개혁 마무리를 끌고 가는 '행동' 을 시장은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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