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규장각도서 등가교환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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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둘러싼 한국과 프랑스간의 전문가 협상이 또다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사흘간의 회의를 끝냈다.

이번 세번째 전문가 회의에서는 비록 합의문 서명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프랑스측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2백97권에 대한 반환형식과 방법문제를 놓고 구체적 의견접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프랑스가 소장한 외규장각 도서 2백97권 중 유일본 64권을 비슷한 가치를 지닌 국내 도서와 우선적으로 교환하고, 나머지 어람용 2백33권도 한국이 보관 중인 같은 판본의 비어람용 의궤(儀軌)로 올해와 내년 절반씩 맞교환하자는 데 원칙적 합의를 봤다는 것이다.

도서 반환을 위한 전문가 회의는 조만간 프랑스 파리에서 속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협상이 1993년 시작단계에서 훨씬 후퇴해 마치 등가교환이 기정사실화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 데는 크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외규장각 도서의 국내 반환은 우리가 귀중한 국가문화재를 불법 약탈당했던 원소유국으로서 이를 되돌려받는다는 원칙과 명분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조건 없는 영구반환을 주장하던 우리측이 영구임대로 한발 물러섰다가 이젠 프랑스가 제안한 등가물교환 원칙에 합의한 것은 그만큼 '가져오는 것' 에만 연연해 조급증을 낸 탓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의 지적이다.

불법으로 약탈당한 문화재를 우리의 다른 문화재와 교환해 돌려받는다는 것은 이같은 명분을 포기한 일방적인 양보다. 어느 의미에선 이중의 문화재 유출이 될 수 있다.

거기다 등가교환은 문화재의 강제약탈이라는 프랑스의 불법행위를 국가가 앞장서 합법화하고 공인해 주는 셈밖엔 안된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은 상대측에 조급증을 내보일 사안이 아니다.

약탈전리품의 원소유국 반환을 의무화하고 있는 전시국제법이 있고 프랑스.독일간 약탈문화재를 상호교환한 선례도 있지 않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칙과 명분을 깨지 않는 당당한 협상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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