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TV 부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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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맨 처음 세상은 어둠이었다. 소리도 없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내 눈과 귀가 빛과 소리를 주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은 이름을 얻어 형상이 되고 말이 되었다.

천지창조 신화는 이런 구조로 환원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창조주다. 창조주는 초자연적 존재고 그들의 창조 역사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깨달으며 받아들이다 마침내 죽는다. 우리 인생 또한 신화의 되풀이로 볼 수 있다. 그리해 개인 신화가 탄생할 수 있다.

개개인으로서의 나를 대표해 신화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예술은 절대정신의 직관적 표현이며 따라서 아름다운 대상, 즉 뛰어난 예술작품에는 절대자가 스스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 헤겔의 예술철학이다.

세상이 익어터지는 순간의 이미지를 잡아 이를 우리에게 전하며 인간의 삶을 심원하게 만든다는 게 이미지의 현상철학자 바슐라르의 예술관이다.

이 예술의 진수가 서울에 왔다. 예술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연결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백남준씨의 40여년에 걸친 독보적인 예술적 실험과 작품이 서울에 와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백씨는 "예술이란 신화를 파는 작업" 이라고 밝혔다. 그가 판 신화, 작품들은 지금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가보처럼 전시되고 있다.

부처상과 마주 한 모니터로 구성된 'TV 부처' 란 작품을 보면 TV가 명상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전하고 있는 TV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유쾌한 혼란을 일으키며 TV를 재창조해 낸 것이다.

식물 사이에 설치된 모니터들의 'TV 정원' 의 식물은 문명의 이기인 모니터들의 도움을 받아 나직나직 그들의 비밀스런 탄생 신화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레이저를 쏘아 만들어 낸 '야곱의 사다리' 는 천지창조의 신화를 현재화해 그대로 우주로 발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이름과 작품 자체가 세계적인 신화가 된 백씨는 한단계씩의 사다리를 거쳐 그 경지에 이르렀다. '미친 사람' 이라는 욕을 들을 정도로 기존 관념을 철저히 깨부수며 한계단씩 올라가 '야곱의 사다리' 라는 천지창조의 예술에 이른 것이다.

우리 각각의 마음 속엔 그런 장엄함을 감상해낼 수 있는 개인적 신화, 예술혼이 있기에 오늘도 바쁜 오욕의 일상을 의미있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경철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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