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김구현 전 송포단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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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재 지난 2일 57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구현(金九鉉)씨는 간질환자들의 치료와 사회 적응을 위해 헌신해 온 '간질환자들의 대부' 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간질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해 주고 이들이 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었던 고인은 평생의 소망을 미완(未完)으로 남겨둔 채 아쉽게 삶을 마감했다.

지난 2, 3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영안실 金씨의 빈소를 찾은 50여명의 간질환자와 그 가족들은 "우리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며 베품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반용범(潘龍範.47.회사원)씨는 "고3 딸아이가 6년전부터 간질을 앓아왔는데 金씨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이제 거의 완치가 됐다" 며 "평생 딸아이의 건강을 책임져 주겠다고 몇번을 약속했었는데…" 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4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金씨는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경북 의성군 친척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중학교때 절친했던 친구가 간질에 걸려 갑작스레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평생 힘닫는 데까지 간질환자들을 돕고 살겠다' 고 결심하게 됐다.

이후 70년 상경, ㈜동서석재 수출입상사를 차리고 돌 가공업에 뛰어든 金씨는 사업에 성공해 적잖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중학교 친구의 안타까운 모습은 줄곧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89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지인 10여명과 '간질연구동호인회' 를 결성, 본격적으로 간질환자 돕기에 나섰다.

관련 서적과 논문을 독파하고 세미나를 열면서 간질환자들에게 진정 필요한게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93년 '간질어린이사랑회' 를 결성했다. 간질환자의 30%가량이 4살 미만의 아동이고 20세 미만의 청소년 환자가 전체의 75%에 달하는데 착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재 5억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송포재단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치료비를 지원해준 환자는 1백여명. 또 1만번이 넘는 상담과 30여차례에 걸친 세미나를 통해 환자들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장남 영철(永哲.34)씨는 "부친은 평소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해 왔다" 며 "특히 간질환자들이 치료보다 주위의 편견어린 시선 극복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데 애통해 했다" 고 말했다.

함께 재단을 이끌어온 이상옥(李相玉)안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길을 가다가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며 "어린이 환자들을 돕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는데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 안타까워 했다.

현재 국내 간질환자는 40여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매년 2만여명이 새로 발병하고 있다.

아직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완치는 힘들지만 꾸준한 치료를 받으면 상당 수준까지 회복이 가능하다는 게 의학계의 견해다.

金씨가 마지막으로 정열을 불태운 것은 간질환자들의 원만한 사회적응을 위한 '간질사회복귀교육원' 을 세우는 것. 이를 위해 사재 6억원을 추가로 내놓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1백50여평의 부지를 확보, 내년초 완공을 앞두고 있다.

별다른 지병없이 심신이 올곧게만 살아온 그였지만 지난 2일 새벽 갑작스레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주위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승을 떠났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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