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읽기] 역사 드라마 올바로 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역사상의 두 인물이 새천년 첫해 상반기 대한민국 TV를 지배했다.

'허준' (MBC)과 '태조 왕건' (KBS1)이 그들이다. 얼핏 보면 하나는 침으로 대표되는 의술로, 또 하나는 창으로 상징되는 무술로 세상을 '정복' 한 듯 보인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에는 시공을 넘어 사람을 끄는 보편적 가치가 내재해 있다.

미덕의 리스트는 지혜와 사랑, 용기와 인내다. 속은 강하지만 겉은 부드럽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천년 전의 일에 왜 대중은 오늘 다시 열광하는가. 집단의 꿈이 거기에 영글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계산서 주고받듯 하고 통일의 염원이 영수증 처리되듯 해서는 아름다운 세상의 도래는 요원하다. 누구의 말대로 목표는 달라도 목적은 순수해야 좋다.

'꿈보다 해몽' 이란 속언은 오히려 텔레비전 바깥 풍경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가 '정치계의 허준' 임을 내세웠고 한쪽에서는 '자주적인 힘으로 민족통합의 시대를 연 신왕건주의' 의 신봉자임을 자처했다. 자기 이익대로 끌어다 쓰는 아전인수의 북소리가 요란했다.

한 드라마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데는 저마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볼거리가 풍성한 드라마가 있고 줄거리가 짠한 드라마도 있다. 대체로 전자는 스타에 의존하고 후자는 영웅에 의탁한다.

'허준' 과 '태조 왕건' 은 후자의 비중이 좀더 크다. 이들 영웅 앞에는 꺾이지 않는 원칙이 있다. 허준에게는 생명존중의 원칙이 있었고 왕건에게는 신상필벌의 원칙이 있었다.

명작 탄생의 4원소는 재능과 정열, 그리고 시간과 돈이다. 두 드라마의 성공비결은 공든 탑 쌓기에 비유할 수 있다.

우선 준비기간이 비교적 길었다. 완성도를 향한 땀방울이 장면마다 배어 있다.

이를테면 "천군만마가 달려온다" 를 영상으로 구현해 낸 호방함(스펙터클)과 복식 하나를 제대로 고증하기 위해 중국까지 다녀오는 섬세함(디테일)이 '태조 왕건' 의 극적 완성도를 튼실하게 해준다.

'허준' 이 물러간 자리는 의인이 떠난 자리이기도 하지만 시청률 일등이 사라진 무주공산의 자리이기도 하다.

여러 측면에서 '태조 왕건' 이 그 자리를 승계할 것이 예상된다. '옥에 티' 는 물론 역사드라마를 둘러싼 시시비비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드라마는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이지 역사는 아니다.

"나는 괜찮지만 행여 청소년이 자칫 역사를 왜곡해 받아들일까 걱정된다" 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청소년들부터 차분히 가르칠 일이다. 큰 줄기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역사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후삼국과 고려 초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사극으론 '태조 왕건'이 처음이다. 그 전인미답의 도전정신에서 기백이 느껴진다.

국사 교과서에 단 한 줄로 적혀 있는 인물들, 이를테면 각간 위홍이나 복지겸 등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보며 그 후손인 우리도 역사의 백두대간에 함께 서 있다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역사를 구슬에 비긴다면 작가는 그것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자이다. 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시선이다. 그가 어떤 사관을 지녔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