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해외 경제 석학 릴레이 진단 ⑤ 소비주의의 종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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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는 불가피하게 구조적 변화를 몰고 온다. 위기가 끝나도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 뭔가 영구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재의 위기는 단지 금융 세계화의 부작용이 아니다. 금융 세계화가 실패한 건 지속될 수 없는 종류의 경제 활동에 많은 걸 걸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5년간, 특히 최근 5년 동안 세계가 미국의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걸 말하는 거다.

미국식 소비는 광범위한 모방을 부추겼다. 수십 년에 걸쳐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은 똑같은 브랜드와 디자인, 생활양식을 갖추고 서로를 닮아갔다. 소비, 보다 정확히는 소비주의(consumerism)가 세계화됐다. 미국 대학들은 소비와 소비주의에 대한 학문을 가르치는 새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2001년 9·11 테러의 여파 속에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국민에게 테러의 충격 때문에 일상적인 쇼핑이 지장을 받아선 안 된다고 권고했다. 소비가 애국적인 의무이자 미덕이라는 뜻이었다.

이번 경제 위기는 단순히 금융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기는 주택 담보 대출 분야의 취약성 때문에 시작됐다. 주택 가격에 거품이 끼는 바람에 많은 미국인이 자산의 추정가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빌려 소비해버렸다. 많은 이가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한 소위 ‘국제적 불균형(global imbalances)’은 미국과 미국식 모델을 제일 많이 따라 한 영국·아일랜드·스페인 등의 제로에 가까운 저축률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기의 와중에 이들 빚쟁이 국가의 소비자들은 돌연 구매 행태를 바꿔버렸다. 저축률이 치솟았다. 많은 정부가 구매 촉진 정책으로 되살리기 전까지는 자동차 구입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연료를 많이 먹는 낡은 자동차를 버리고 새 차를 구입하는 데 보조금을 지급하는 식의 정책은 예정된 구매를 앞당기게 했을 뿐이다. 그 덕에 올해 자동차 시장이 살아났을지 모르지만 내년과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다.

위기는 미국 소매 시장이 얼마나 과잉 상태였는지를 드러냈다. 적어도 미국 쇼핑몰 중 5분의 1이 문을 닫게 될 것으로 추산된다. 위기가 닥치자 온라인 쇼핑이 더 활성화됐고 그 결과 쇼핑몰이 집에서 가까운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돼버렸다. 지난해 4분기엔 고가 명품 브랜드들이 할인 열풍 때문에 치명타를 입었다. 브랜드의 후광은 쉽게 무너졌다. 고급 여성 구두 브랜드인 지미추가 저가 브랜드인 H&M을 따라 급격히 마케팅 전략을 바꾸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소 회복된 건 이른바 ‘만만한 명품’이라 불리는 구두·핸드백·넥타이 등에 한정된다. 상대적으로 저가의 명품 품목을 사들이는 풍조는 전 세계를 휩쓴 소비 열풍의 퇴조라 할 만하다.

소비의 시대는 앞선 두 번의 위기가 잉태한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 부적절한 소비, 풍요 속의 빈곤이 초래한 걸로 분석됨에 따라 각국 정부는 광범위한 소비를 조장하는 책임을 떠맡았다. 70년대의 두 번째 세계 경제 위기는 국가 주도의, 중공업 중심의 경제를 흔들었다. 대신 개인의 욕구에 따른 소비라는 새로운 모델을 탄생시켰다. 세밀하게 특화된 시장을 겨냥한 ‘니치(niche) 제품’의 생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개개인의 소비는 스스로를 남과 차별화할 수 있는 방편으로 자리 매김했다.

돌아보면 70년대는 대량생산이 끝나고 새로운 소비의 시대가 열린 분기점이었다. 생산의 시대는 값싼 차를 대량 생산한 헨리 포드의 이름을 따 ‘포드주의(Fordism)’라고도 불린다. 상상력의 빈곤 탓에 소비의 시대는 ‘포스트 포디즘’이라 명명됐다. 그 대신 ‘톰 포디즘’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이탈리아 패션 명가인 구찌에 입성해 주가를 높인 젊은 미국 디자이너 톰 포드의 이름을 따서 말이다.

향후, 소비주의 시대는 무엇으로 대체될 것인가. 명백한 답은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이다.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이미 전환이 시작됐고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소비주의는 지나칠 만큼 개인주의에 기대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의 효용이 중요하다고 믿기에 빚까지 져가며 소비한 것이다. 아름다운 보석이나 멋진 신차를 보면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것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물건을 사는 데서 오는 만족은 오래 안 가며 계속 반복해야만 지속된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서비스 경제는 개인적 소비보다 사람끼리의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일례로 고급 호텔들이 요즘은 부자 고객들의 열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역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조성하는 서비스도 한다. 사람이 섬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호 관계에 의존한다는 점에 주력한다면 서비스 경제는 보다 높은 수준의 웰빙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해럴드 제임스 프린스턴대 교수·역사학
ⓒProject Syndicate

◆해럴드 제임스(Harold James)=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 다. 저명한 경제사학자로 『세계화의 종말(The End of Globalization)』 등 10여 권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