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은행 대형화만 능사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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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2단계 금융 구조조정이 급류를 타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경제를 챙기겠다고 나선 데 이어 정부가 밑그림을 공개했다.

한빛.조흥.외환 등 공적자금 투입 은행들은 정부가 나서서 금융 지주회사 아래 통합하고, 우량은행들은 자율 개혁을 유도하겠다는 게 골자다.

금융 구조조정의 불투명성이 금융시장 안정에 걸림돌이 돼 왔던 점을 감안할 때 윤곽이나마 드러난 게 다행이다. 중앙종금과 제주은행이 합병을 발표하는 등 시장에서도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노력이 성공하려면 꼭 지켜야 할 원칙과 전제조건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원칙에 충실하고 일관성을 갖는 것이다. 당장 한국종금에 대한 정부 지원 결정을 놓고 형평성 시비가 일고 있다.

과거 이런 논란거리들이 큰 부작용을 낳은 사례를 여럿 봐 왔다.

상황에 따라 원칙이 달라진다면 금융 구조조정은 설득력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실패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지주회사를 통한 공적자금 투입은행 정리 계획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목적은 수평적.물리적 통합을 통한 대형화가 아니다.

전문화.효율화를 통해 체질 개선과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조직.인력 정비가 경영진 개편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다.

비슷한 영업망과 조직을 가진 3개 은행이 합병 효과를 거두고 강한 조직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점포.인력의 획기적인 정비가 필수적이다.

과거 서울은행이 물리적 결합의 벽을 넘지 못해 부작용과 함께 부실화의 길을 걸었고, 상업.한일은행이 합친 한빛은행 역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금융노련이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어 향후 과정도 순탄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실패 사례가 되풀이될 뿐이다.

금융 지주회사 설립에 필요한 관련법 정비도 시급하다.

관련 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강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엄청난 자금이 투입됐지만 금융 구조조정은 별 성과를 못 거두고 있다.

2단계 개혁이 성공하려면 해당 기관들의 부실을 공개해 투명성을 높이는 한편 자구노력에 태만한 관계자들은 엄히 문책해야 한다.

중앙종금.제주은행의 합병 발표를 놓고 말들이 많다.

'공적자금을 타내기 위한 편법이 아니냐' 는 지적과 함께 내부 정보를 이용한 주식 사전 매집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시작부터 이러면 곤란하다. 철저한 조사, 그리고 필요하면 강한 문책이 요구된다.

정부 및 감독기관들도 구조조정을 인사 적체 해소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최근 금융권에 대한 재정경제부.한은.금융감독원 등의 낙하산 인사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현 금융 부실에는 정부의 정책 오류와 감독 부실에도 적잖은 책임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해당 기관에 가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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