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반세기 아픔은 이제 그만] 이산 상봉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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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상봉의 길은 멀고 험하다.

생사확인, 편지.사진 전달에 이은 상봉의 기쁨이야 이루 형언할 수 없지만 이 과정에 함정도 많다.

비록 만났더라도 오히려 상처가 깊어지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북쪽 가족들이 만남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도 분단의 벽을 넘어 북쪽 친지를 찾는 발길은 계속되고 있다.

◇ 상봉〓황해도 출신으로 대전에 사는 H씨(81). 1.4후퇴 때 두고 온 딸을 못잊어 1997년 국내 민간상봉 주선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이 단체는 중국에서 고용한 동포를 통해 수소문 끝에 딸의 소재를 파악했다.

딸은 월남자 가족으로 분류돼 멸시와 탄압 속에 어렵게 살고 있었다.

H씨는 세차례 편지와 사진을 주고 받은 끝에 상봉을 결심하고 네번이나 중국 옌지(延吉)로 빼내려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북한의 감시원과 통행증 발급기관에 무려 2만3천달러(약 2천5백만원)의 뇌물을 주고 딸의 이동경로를 뚫었다.

딸은 남편과 함께 열흘 만에 무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두만강을 넘어 아버지와 옌지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딸이 예정시간 5시간을 넘어도 소식이 없었다.

대신 새벽 1시쯤 중국 공안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국 공안에 모두 붙잡힌 것이다.

H씨는 중국 공안 고위층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새벽 2시 50년 만에 딸과 극적으로 만났다.

5박6일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H씨는 딸이 겪은 50년의 고통에 대해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 안타까움〓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낙동강 전투 때 포로로 잡혀 전향한 H씨(69). 지난해 3월 중국동포를 통해 어렵게 동생의 북한 주소지를 파악했다.

처음엔 생사확인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중국동포의 손을 빌려 편지와 사진을 은밀히 북한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전사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느냐" 며 형의 존재를 완강히 부인한 것이다.

형이 전사자로 분류돼 북한에서 '영웅가족' 으로 칭송받으며 살고 있었던 동생은 형의 생존사실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동생은 쓸쓸히 돌아서는 중국동포에게 "통일되면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라고 살짝 귀띔했다고 한다.

만남을 거부하는 북측 가족 대부분은 대체로 당성이 강하거나 '월남자 없음' '폭격으로 사망' '전쟁 때 실종' 등으로 주위에 알린 뒤 영웅대접을 받은 경우가 많다.

◇ 실패〓지난해 가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약 2개월 동안 주민통제가 극심했다.

당시 L씨(71)의 부탁을 받고 가족을 찾아나선 중국동포 연락책 2명이 L씨 가족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보위부에 발각됐다.

이들은 3개월간 갖은 고초를 겪은 뒤 L씨가 들여보낸 또다른 중국동포를 통해 뇌물을 건네고나서야 풀려났다.

하지만 이들이 접촉을 시도했던 북한의 L씨 가족은 그 후 정밀감시 대상으로 분류됐다.

가족의 재회는 당분간 물건너 간 것이다.

또다른 L씨(82)는 전쟁 중에 부인을 잃고 딸(56)과 아들(53)마저 북에 두고온 것이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그러다 97년 일본에 사는 친구를 통해 자식들이 함경남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렵게 편지를 주고받던 L씨는 중국의 국경 도시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갑작스레 국경쪽으로 여행하는 L씨의 아들.딸을 밀착 감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 상처〓평남에 이웃해 사는 A, B씨는 남쪽 가족의 부탁을 받은 동포 연락책을 통해 소식을 주고 받았지만 남쪽 가족의 반응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A씨의 남쪽 가족은 "생사확인만으로 족하다" 며 더 이상의 접촉을 꺼렸다.

반면 B씨의 실향민 가족은 지속적인 연락과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상봉까지 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A씨는 상봉은커녕 연락조차 끊기자 동포 연락책을 의심, 당국에 B씨와 함께 고발하겠다고 흥분했다.

A씨는 자신도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고발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남쪽 가족에 대한 배신감만 안은 채 절친한 이웃 B씨와도 담을 쌓았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씨는 98년 북쪽 동생과의 상봉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동생이 갖은 고초 끝에 교화소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중국 연락책을 통해 들었다.

당시 동생은 언론에 상봉사실을 알린 형을 야속해하며 "아버지가 형만 남한에 남겨놓고 월북해 형이 섭섭했나보다" 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李씨는 가슴을 쳐야했다.

정용환.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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