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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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7. 과묵한 주당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일이 있을 때라든가 위기에 처했을 때 크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구선생님이 탑골에 오시면 참으로 조용하게 술을 드셨다. '과묵한 술꾼' , 그런 말이 있다면 구선생님께 딱 어울리는 말이리라.

대개의 경우 신경림.민영.정희성 시인 등과 함께 왔고 인병선 시인(신동엽 시인 부인)이 동행할 때도 있었다. 특히 신동엽 창작기금 수여식이 끝난 날은 틀림 없이 탑골에 오셨다. 그런 때는 가게 안이 매우 어수선했고 좋게 말하면 활력에 넘쳤다.

또 그런 날은 술자리가 무르익게 되면 누군가가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을 하면서 노래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이야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데 큰 제약이 없지만 1987년 무렵에는 여러 제약이 많았다. 부르는 노래도 은근히 제약을 받았으며 말하는 수위도 적당한 선을 넘는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그 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선생님이 호명되어 노래를 불러야할 차례였다. 대개 연만한 어른들께선 트로트 풍의 옛노래를 불렀던 터여서 그와 유사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난데없이 신동엽 시인의 시와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분위기가 묘해져서 웅성거리게 되는데 구선생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말씀하신 연후 노래 대신 좋은 시를 들려주시겠다며 정지용의 '향수' 를 낭송하시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납.월북 시인들의 작품이 해금이 되네, 안되네 하던 때여서 약간의 긴장이 요구되었지만 구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의젓하고도 장중하게 시를 암송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로 매듭 되는 5 연의 긴 시를 한번의 막힘도 없이 낭송을 끝내자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러자 다시 한 말씀이 시작되었다.

"여러분이 좋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항상 마음 속에 새길 말로 다산 정약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不憂國 非詩也' (불우국 비시야)라는 말인데 시를 쓰되 민족이라든가 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나라를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다소 과격한 이 말을 오늘같이 험한 세상에서 시인들이 늘 마음에 두어야 시가 음풍농월이나 한가한 자의 소일거리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래판이 걸판지게 벌어져 계속 소란스러울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신되었고 다소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다시 구선생님이 "내가 느닷없이 분위기 망치는 얘기를 했노라" 며 대단히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냥 재미나게 노래하고 술 마시자고 제안하셨다. 그러자 누군가가 혼잣말로 한 마디 했다.

"구중서는 저게 병이야. 아무 때나 너무 무게를 잡는다구. 하기사 그게 구중서지, 어디가!"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지만 나는 가끔 마구 달려가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한 번은 일단 멈춰서고 다시 갈 길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때에 바로 구선생님이 지니신 풍모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 구선생님이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이라든가 한국민족에술인총연합 이사장을 역임하시게 되는 일이 바로 그러한 모습의 방증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런 구선생님도 바둑을 둘 때는 달랐다. 바둑이란 묘해서 그 어떤 사람도 승부욕의 화신처럼 변하게 하는 요물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 수 물러달라는 말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일이나 딴 돈을 호주머니에 챙기면서 짓는 그 표정은 전혀 다른 또 한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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