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 반군 징집 동원 87명 탈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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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부군과 반군간 내전으로 포연이 자욱한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소년 병사와 성적 노리개로 전선에 동원됐던 소녀 등 어린이 87명이 가톨릭 신부 등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27일 사흘 밤낮을 울창한 밀림과 강을 헤쳐 가까스로 지옥의 전장터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시에라리온 출신 어린이들의 탈출기를 자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들의 탈출을 '신의 은총이자 기적' 이라고 표현했다.

탈출에 성공한 이들 남녀 어린이는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1백60㎞ 떨어진 마케니 지역 캐리타스 재활센터의 수용자들.

로마 가톨릭계열의 자선기구인 이 재활센터가 수용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지난 8년간의 내전기간 중 소년 병사나 짐꾼, 성적 노리개로 전선에 동원됐다가 지난해 7월 정부군과 반군인 혁명연합전선(RUF)의 평화협정에 따라 재활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달 초부터 내전이 재개되면서 반군과 정부군들이 다시 소년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지난주 반군이 재활센터에 들이닥쳤다. 반군은 54명을 병사로 차출해갔다.

에드문드 코로마 재활센터 책임자 등은 반군에 협정준수를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 가까스로 48시간 이내에 어린이들을 옮기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2백30명의 어린이들이 프리타운 인근의 캠프로 옮겨졌다. 반군은 그러나 바로 다음날 마케니의 유엔 평화유지군을 공격, 수백명의 요원을 인질로 잡았고 평화롭게 어린이들을 옮기는 것은 물건너가 버렸다.

캐리타스의 간부들은 이때부터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웠다.

D데이는 5월 23일 오전 4시. 매일 전투가 끝나면 반군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곯아떨어져 있는 점에 착안, 동트기 전 짧은 시간을 이용키로 했다.

27명의 캐리타스 직원의 인도로 87명의 어린이들이 새벽 어스름 속 정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출발후 16㎞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 로켈 강에 도착한 직원들은 키가 작은 어린이들의 경우 무동을 태워 건너게 했다. 둘째날인 24일 이들은 정글속에 매복해 있던 3~4명의 반군에게 포위됐다. 그들은 남녀를 분리해 세운 뒤 17명의 건강한 남자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

또 돈과 담요.옷가지 등 소지품을 모두 빼앗았다. 코로마도 트럭을 빌릴 돈 1백50달러를 빼앗겼다.

15세로 반군 지도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업고 탈출에 나섰던 파트마타 만사레이가 반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아이를 가진 아이에 불과하며 돈과 약탈품만 가져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반군은 짐꾼으로 15세의 소년 한명만 데려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놓아주었다. 이들에게는 그 두시간 반 동안이 영원처럼 길었다.

25일 밤 '밀레91' 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땔감 목재를 운반하는 화물트럭 운전사에게 3백달러를 주고 프리타운까지 갔다.

그러나 통행금지에 묶여 길가에서 밤을 지샌 뒤 26일 아침에야 프리타운 인근의 긴급피난처에 안착했다. 2백㎞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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