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의 피로감' 왜 생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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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지난 23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이 국정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면서 장관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金대통령의 말이 경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겠지만 최근의 경제 상황은 국민으로 하여금 피로감을 넘어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금리.환율은 오르고 중소기업은 돈이 안 돈다고 아우성이다. 주가는 연일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우리 경제의 제반 여건은 3년여 전 외환위기 때와 다르다. 외환보유액 8백56억달러는 단기외채 4백34억달러를 갚고 남을 만큼 충분하다.

1분기 경제성장률도 지표상으로는 되레 과열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설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경제정책 당국, 나아가서는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층의 현실 감각과 위기대처 능력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최근의 불안감은 당연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정권이 지난 2년여 동안 국력을 집중한 개혁의 결과는 어떤가. 금융 구조조정에 '64조원+α' 란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들어갔지만 제대로 된 게 없다. 대우 문제는 여전히 최대 현안으로 남아 있다.

기업.공공 개혁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씀씀이도 과소비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됐고 정부가 성과로 내세웠던 벤처 열기도 상당 부분 거품임이 입증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다. 경제장관들의 잇따른 '말 바꾸기' 는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룰도, 일관성도 없는 정부는 불신과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무역수지.은행 합병 등 주요 현안을 둘러싸고 불거지는 부처간 불협화음(不協和音)은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시장의 신뢰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국제유가 급등, 국제금리 상승, 미국 경제에 대한 우려 등 외부 요인이 겹치면서 불안감이 확산하는 것이다.

정부는 더 이상 수적 실적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분명히 인식, 각 경제 주체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급한 것은 신속한 구조조정과 정부의 신뢰 회복이다. 우선 금융산업이 처한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 공적자금 투입도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 국회 협조를 얻어 투명한 방법으로 집행해야 한다.

아울러 정치권에 당부할 게 있다. 사사건건 경제의 발목을 잡아 왔던 민주당이 어제 당정협의에서 "경제를 이 꼴로 만들었다" 며 장관들을 질책하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총선 기간 중 나몰라라 하던 당이 어느날 갑자기 경제관료를 호통치는 모습이 쇼 같기도 하고 면피성 발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경제보다 정치가 더욱 심각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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