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는 이한동…날개꺾인 이종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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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자민련 이한동'(李漢東)' 총재가 국무총리에 지명된 바로 그날(22일) 민주당 이종찬(李鍾贊)고문은 정치 중단과 미국 유학을 선언했다.

대표적인 5공 출신 정치인이었던 두 사람의 명암이 또한번 갈렸다.

둘은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정국을 주도한 민정당의 꿈나무. 육사와 서울대 법대 출신이 많아 '육법당(陸法黨)' 으로 불린 민정당의 육(李고문.육사 16기).법(李총리지명자.서울대 법대) 양대 인맥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초기엔 李고문이 앞섰다.

81년 당직은 이종찬 원내총무에 이한동 부총무였다.

이후 이한동 총장.이종찬 총무(85년), 이종찬 총장.이한동 총무(89년) 등 요직을 주거니 받거니하며 성장했다.

14대 대선(92년) 이후에는 李총리지명자가 밝은 쪽이었다.

김영삼(金泳三.YS)씨가 대통령이 될 때 李고문은 반(反)YS, 李총리지명자는 친(親)YS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고문이 97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만들어 내면서 입장은 바뀌었다.

李고문은 국가정보원장 등을 거치며 재기했고, 李총리지명자는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이회창'(李會昌)' 총재와 싸우는 비주류로 남았다.

李총리지명자는 한나라당 탈당-자민련 총재-총리지명의 순으로 활로를 찾아나갔고, 李고문은 언론문건 파문-16대 총선 종로선거 패배로 날개가 꺾였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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