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칼럼] '귀신이나 뚫을 저승의 스펙' 대치동 엄마의 한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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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엄마들. 아이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쇼핑을 한다. 아이가 하교해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 “유학 가자!”고 한다.

서초동 엄마들. 아이가 학교 가면 문화생활을 즐긴다. 아이가 하교해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아빠가 가르쳐 주실거야”라고 한다(서초동 아빠들은 법조인이 많다).
분당 엄마들. 아이가 학교 가면 낮에 모임을 가진다. 아이가 하교해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팀을 짜자”고 한다.

대치동 엄마들. 아이가 공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 직접 공부해 가르친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 가면? 낮잠을 잔다.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직접 공부해 가르치느라 피곤해서다.

학부모들 사이에 나도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우스갯소리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절대로 각 동네의 어머님들을 폄하하기 위함은 아니다. 사실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올 만큼 사교육이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건 진실이다.

한 달 전 기자의 칼럼 제목은 ‘대치동 엄마의 쓴웃음’이었다. 어찌 보면 대치동 엄마는 사교육 광풍의 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치동 엄마들마저 사교육 불길이 잡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이 글은 속편 격이다.

칼럼이 나간 지 한 달 새 굵직한 사교육 대책이 쏟아졌다. 지난 10일엔 마침내 외고 입시개편안이 나왔다. 학생수를 확 줄이고, 줄어든 신입생들은 입학사정관이 100% 뽑게 만든 게 골자다. 이젠 ‘내신+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입시지형이 바뀌게 된 것이다. 내신은 중 2, 3학년 영어만 반영한다. 입학사정관들은 ‘학교생활기록부’ ‘학습계획서’ ‘학교장추천서’로 뽑아야 한다.

당초의 외고 폐지론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사실 외고 폐지란 말은 틀린 표현이다. ‘외고 입시’ 폐지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외고의 문을 닫으라는 게 아니라 외고가 가진 학생 선발권을 없애 추첨으로 뽑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입시는 폐지하지 않고 외고의 문을 좁혀 버렸다. 더 경쟁이 치열해지도록 말이다. 사교육이 유발되게 만들어 놓은 게 사교육 대책이라니.
한 달 전 칼럼에 등장한 대치동 엄마의 의견을 물어봤다. 이 정도의 개편안이면 조금 사교육비가 줄어들고, 아이들도 좀 놀 수 있을는지. 그런데 대치동 엄마의 ‘쓴웃음’은 이젠 ‘한숨’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단 ‘비교과 비중’이 높아질 입학사정관제도가 학부모들에게 공포 자체였다.
“‘수능+내신+논술’, 이 세 가지를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수능+내신+저승의 스펙’이라고 해요.”

각종 복잡한 대학 수시전형, 입학사정관 전형을 뚫으려면 ‘귀신’이 되어야 했는데, 이제는 외고입시에서도 ‘저승의 스펙’이 필요하게 생겼다고 했다.

대치동 엄마는 10일의 개편안이 나온 지 하루 뒤 날아온 두 통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했다.

“입학사정관제에 유리한 정상커리큘럼 내일(토) 신규시험 있으니 응시하세요.”(A학원)

“외고 입학사정관제로 최종 결정. 향후 입시는 수상과 실적 중요. 수상실적은 OO. 겨울방학 강좌 선착순”(B학원)

불안한 학부모들에게 유명 학원들은 번개같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런 일도 겪었단다.

“명문대 글로벌 리더전형을 생각하는 어떤 아이는 수백만원 들여 유엔인가 가서 봉사활동 하고 왔어요. 어떤 봉사단체는 격주로 토요일 한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헉…연회비가 70만원이 넘었어요. 봉사 가는 데 웬 회비? 게다가, 봉사는 3~4시간만 해도 봉사인증시간은 6시간 이상 받아준다는 유혹까지 하더군요.”

공부하는 학생들한테 요구할 게 따로 있다. 그게 억지봉사로 만든 저승의 스펙일까.
“좀 입시제도가 심플해지면 안 되나요? 우리 세대도, 윗세대도, 이 난리 안 치고 대학 갔지만 우리나라 이 정도로 만들어 놨잖아요. 입학사정관제니, 수시전형이니, 특기자 전형이니, 수능에, 내신에, 봉사점수에, 온갖 실적에, 교내외 다양한 활동에, 외국어 능력에. 그러니 할아버지 경제력까지 동원해야 한다고 하지요. 자기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서 왜 애들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사실 무슨무슨 ‘대책’ ‘개선안’이 한 번씩 나올 때마다 전형제도는 몇 배씩 복잡해졌다. 사교육을 줄이는 제일 빠른 길이 대입이든 고입이든 입시제도를 단순하게 만드는 것일 텐데 말이다. 언제쯤 이런 역주행이 끝나 대치동 엄마의 한숨이 미소로 바뀔까.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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