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진타오 시대] 장쩌민의 정치 역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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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 중국 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정치 역정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유지로 남겼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로 요약된다.

공산당에 입당한 지 30여년 만에 정치 일선에 나온 그는 순식간에 당.정.군을 아우르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불과 8년이었다. 1989년 상하이(上海)시 당서기였던 장 전 주석은 그해 6월 천안문(天安門) 사태 때 학생 시위대에 관용을 보였던 자오쯔양(趙紫陽) 공산당 총서기가 실각하자 당 총서기직을 이어받으며 단숨에 공산당 권력 핵심에 진입했다.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장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제일 도시인 상하이의 민심을 철저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중앙 정치권에 변변한 정보망이 없었던 장은 부서기였던 쩡칭훙(曾慶紅)의 정보와 분석을 바탕으로 시위대 진압 결정을 내린 덩샤오핑 등 당 원로들을 지지하는 등 확실한 추진력을 보였다. 장의 행동은 자오 총서기와 덩의 보이지 않는 대치의 저울추를 한순간에 덩 쪽으로 기울게 했다. 장은 이때 덩의 눈에 들었다. 혁명 열사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과 전문 관료로서의 실적, 원로들에게 깍듯하게 예우를 아끼지 않았던 성품 등이 고속 승진의 밑거름이었다. 게다가 리펑(李鵬)총리와 불안한 동거 시절 군(90년 3월).정(93년 3월)의 최고위직에 오르는 관운(官運)도 있었다.

35년 상하이 교통대학 전기전자과에 입학한 그는 85년 상하이 시장에 취임하기까지 줄곧 생산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 때문에 그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권력의 최상층부에 진입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89년 당 중앙에 진출한 장에겐 양상쿤(楊尙昆)형제와 리펑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가 있었다.

군사위 부주석 양상쿤과 그의 사촌동생 양바이빙(楊白氷)군 총정치부 주임은 양자장(楊家將.양씨 형제가 장악한 군부)이라 불릴 정도로 난공불락의 군 실력자였으며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이 있었다. 장은 이렇게 권력이 과도하게 두 사람에게 몰린 상황을 역이용, 덩이 이들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하는 데 성공했다. 양씨 형제가 양자장 측근들을 군 인사에서 전면 배치하자 이를 "덩을 넘어서려는 사전 포석"이라고 맹공, 덩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었던 것.

또 95년 리펑 총리의 심복이었던 천시퉁(陳希同) 베이징시 당서기를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당무를 정지시키며 무력화시켜 리펑의 발을 묶었다. 이 사건을 통해 장은 중앙 정치 무대인 베이징에 최측근들을 심을 수 있었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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