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씨 사기때 '대통령 처조카' 사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구권(舊券)화폐 사기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17일 검찰에 검거된 장영자(張玲子.55)씨는 사기행각을 벌이면서 최고위층의 인척임을 내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張씨의 한 측근은 최근 기자에게 "張씨가 사기 피해자들과 만나면서 '내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사촌처제' 라고 말해 왔다" 고 밝혔다.

그는 또 "張씨가 자신이 '로열 패밀리' 의 일원임을 암시하기 위해 '요즘도 조카(대통령의 아들)가 자주 찾아온다' 며 사기행각을 벌여 왔다" 고 말했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부지청 관계자도 "張씨가 전.현 정권의 고위 공직자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 이라며 "특히 張씨가 현직 대통령의 처제임을 내세우며 검찰 수사에도 영향을 미치려 했다" 고 말했다. 그는 張씨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려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현재 張씨가 1백43억원 규모의 구권 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지만 최종 피해규모는 이보다 훨씬 커질 것" 이라고 밝혔다.

◇ 사기 수법〓張씨는 지난해 11월 Y은행 모 지점 李모(38.구속)과장에게 "구권으로 30억원을 주겠다" 며 자기앞수표 20억원을 받아내는 등 지난 2월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1백43억원의 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구권화폐란 1994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로 신권과 달리 은빛 실선이 없다.

금융시장의 운영 원리에 밝은 張씨는 주된 범행대상으로 은행 간부들을 골라 "전 정권 고위층들이 가진 구권화폐 형태의 비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내가 나서게 됐다" "구권 교환을 통해 남는 차액을 수수료로 제공하겠다" 고 접근했다.

張씨에게 속아 잔액이 없는 계좌에서 수표까지 발행했던 은행 간부들은 결국 이 사건으로 2명이 구속됐다.

張씨는 또 이 과정에서 오전에 수표를 발급받은 뒤 은행 영업시간이 끝날 때쯤 "아직 구권이 준비되지 않았다" 며 수차례 수표를 되돌려주는 수법으로 이들을 안심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張씨 검거 때 함께 있었던 전 주택은행 徐모 지점장도 조사해 張씨가 추가적으로 사기를 벌인 혐의가 있는지 밝혀낼 것" 이라고 밝혔다.

◇ 구권의 존재 여부〓검찰은 일단 현재까지는 구권의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구권 사기가 끊이지 않는 점으로 미뤄 구권이 확실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 연루자 중 진짜 구권을 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며 "尹모씨 등이 구권이라고 보여준 것도 실제로는 신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 말했다.

張씨도 지난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尹씨가 구권이라며 1천만원 뭉치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은빛 실선이 있는 신권이었다" 고 밝힌 바 있다.

◇ 수사 방향〓검찰은 앞으로 구권의 실체, 구권 소문의 진앙지, 사기당한 돈의 흐름 등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거액의 구권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張씨가 만들어 사채시장에 유포시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채업자들로부터 나온 소문을 張씨가 이용한 것인지 조사할 것" 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아직까지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돈의 흐름을 추적, 배후세력이 있는 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키로 했다.

검찰 관계자는 "만약 張씨가 사기를 벌인 돈들이 전.현직 고위층으로 흘러들어간 혐의가 포착되면 철저히 조사해 배후를 캘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