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회개원 늦추면 직무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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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야 각 당의 내부사정으로 16대 국회가 국회법상 규정된 개원일(6월 5일)조차 못지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려 3개월 넘게 15대 국회가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 새 국회마저 언제 문을 열지 모르니 이 나라에 국회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됐다.

지난 2월 15대 국회 임시회의를 열어 선거법 등을 처리한 이래 국회는 여태껏 휴면상태에서 국정을 나몰라라 해왔다.

지금 금융 구조조정 문제와 연관해 1백여조원의 공적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또 20조원의 자금이 왜 더 필요한지 국민을 대신해 국회가 따지고 물어야 하는데도 국회는 말이 없다.

또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사안이나 무기 및 고속철도 차량 도입 의혹 처리 등 화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임기가 시작되는 30일 즉각 국회를 가동시켜도 국정 논의에 부족할 상황이다. 그런데도 언제 국회가 열릴지 모를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16대 국회가 늦어질 가능성은 민주.한나라당 원내총무가 15일 원 구성 협상마저 교착상태에 빠지자 아예 협상을 새로 선출되는 양당 총무에게 넘기고 손을 털어 버리면서 가시화하고 있다.

국회의장 선출 등을 위한 과거의 원 구성 협상 경험이나 지난 1개월여의 과정이 보여주듯 이대로라면 16대 국회가 제때에 출범하지 못할 소지는 충분하다.

한나라당은 31일 전당대회를 열어 총재를 선출한 뒤 다음달 2일 의원총회에서 총무를 뽑을 예정이지만 남은 이틀 사이에 양당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원 구성 문제 타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각 개원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전당대회 일정 등을,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남북 정상회담 전 국회 개원 기피 의도를 비난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떼밀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이런 저런 구실을 들어 국회 개원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로 미뤄질 공산이 크다.

지금은 여야가 책임 회피나 할 한가한 때가 아니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책을 세워도 나라 안팎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벅찬 시점이다.

말로만 국정의 중심이 되겠다고 자임할 게 아니라 국회를 열어 국민의 궁굼증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진지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국회법상의 개원일을 굳이 기다릴 게 아니라 하루라도 앞당겨 국회를 가동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0대 국회 이래 단 한차례도 원 구성을 제때에 못한 부끄러운 경험을 되새겨 개원일을 못박아 놓고서도 그마저 못지킨다면 16대 국회의 자질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자질구레한 절차나 일정에 묶여 차일피일 미룰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챙긴다는 각오로 서둘러 국회 개원을 앞당기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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