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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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2. 모범주당 이시영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같고 또 술을 마시거나 마신 후의 모습도 거의 변화가 없는 사람. 이시영 선생은 그런 사람의 대표급이다. 물론 신경림 선생이나 정희성 시인 등도 그런 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시영 선생이야말로 모범적인 단골이었다는 말이다.

이선생은 주로 고은.신경림.황석영.백낙청.송기숙.안종관 선생 등 선배들과 어울려 탑골에 오곤 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20여년을 붙박이로 일하면서 편집장.주간.부사장.사장 등을 역임한 관계로 후배들은 물론 제자급의 어린 후배들과 오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술을 기화로 누군가에게 주정을 한 바 없고 일행이 무사히 귀가하도록 챙기는 가 하면 술값까지 계산하는 그야말로 '모범 술꾼' 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술값 문제는 만만치 않았다. 개점 이래 술을 마신 후 단 한 번도 술값을 가린 일이 없는, 그러면서도 욕설만을 퍼붓던 손님도 있고 얼마 남은 술값이 빌미가 되어 발길이 뜸한 문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값을 가려달라고 연락을 하는 일은 탑골 사전엔 없었다. 내가 그렇게 여유 있게 탑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시영 선생 같은 틀림 없는 고객(?) 덕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참으로 고맙다.

참으로 반가운 사람 앞에서 흉허물 없이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듯 이시영 선생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별 이상한 얘기를 다했지 싶다. 그러나 사실 그런 고마움은 너무도 큰 것이다. 술꾼들이야 처음에는 호기있게 내가 산다고 큰소리도 치곤 하지만 워낙 주머니가 가벼운 문인들이라서 그게 쉽지 않은데다 술값 낸다는 사람이 먼저 술에 취해버려 난감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때 이시영 선생은 그야말로 생색이 나지도 않는 술값을 대신 물어주기도 하고 또 일행이 나눠 내도록 해 마치 탑골의 상무님처럼 일을 처리해 주었다.

성경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가장 긴요한 일을 해주신 것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 이시영 선생도 딱 한번 우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후배문인들 중 하나였는데 술이 얼큰해서 계속 시비를 걸었다.

"시영이 형,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열나게 뒤치닥거리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안실어 주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식들 시는 싣고…. 도대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매번 삼류 시인이고 거리에 나가 최루탄이나 맞으면 되고…."

'창작과비평' 이 동료나 자신의 시를 청탁해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삼십 여분이나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 일은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좀 기다려보자" 는 말도 하고 나중에는 "우리들 말고 다른 사람들 작품을 많이 실어야 실제로는 우리가 커지고 넓어지는 것 아니냐" 는 충고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문인은 심지어 "너는 상업주의 마름 아니냐" 고 극언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시영 선생은 벌떡 일어나 그 후배를 한참 노려보다가 "나 간다. 제발 이러지 말고 좋은 글 써라" 며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 후배는 막무가내였다. 주변에서 다른 문인들이 그 후배를 말렸다. 그러자 그 후배문인은 "이거 놔 썅" 하며 욕설을 퍼붓었다.

그 말에 집에 가려던 이시영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너 이새끼 나와. 나랑 한번 뛰어보자.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순간 모두 놀랐다. 더구나 이시영 선생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동네 건달들처럼 주먹을 쥐고 한판 붙을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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