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미친 기계, 휴대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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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적이 뜸한 주택가 저편에서 웬 중년남자가 혼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미친 사람 같았다. 나는 그가 나에게 무슨 적의를 품고 있나 해서, 적이 방어적인 자세로 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미친 사람들이 동네에 한두명씩 꼭 있곤 했는데 요즘엔 언제부턴가 거리에 광인이 보이지 않는다.

푸코의 말마따나 '근대' 가 광기를 병원에다 감금했기 때문이리라.오랜만에 거리에 나타난 그 광인은 길 한가운데 서서 허공에 삿대질 해대며 고함을 질렀다.

무슨 외상값을 당장 갚으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지면에 인용할 수도 없는, 생식기와 관련된 욕설을 잔뜩 퍼부어 대고 있었다. 나는 짐짓 그가 두려워, 그가 지나갈 때까지 길 한쪽에 서 있었다. 그가 내 옆으로 스쳐갈 때에야 그의 왼쪽 귀에 그의 두툼한 주먹이 쥔 휴대폰이 붙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한 젊은 여자가 뭐라고 뭐라고 혼자 쫑알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온다. 꼭 실성한 여자 같았다. 옛날 같으면 귀 언저리에 꽃을 달고 이런 여자가 동네에 나타났을 텐데, 요즘엔 휴대폰을 대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혼자 중얼거린다든가 혼자 깔깔깔 웃는다는 것은 분명 광증이다. 미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그가 아버지이든 떠나버린 애인이든 혹은 예수님이든, 그들은 필사적으로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데서나 이야기한다. 대로에서든 지하철에서든 화장실에서든 그들은 혼자서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그들은 옆에 누가 있건 없건 개의치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휴대폰이 없기 때문이다.

휴대폰, 이 미친 기계. 아니, 우리 모두를 미치게 만든 기계. 전쟁할 때나 썼던 무전기를 들고 사람들은 미쳐가고 있다. 첩보용 통신기기를 들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혼자 큰소리로 지껄이거나 혼자 중얼거리거나 혼자 깔깔 웃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폴더형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제거하고 그 풍경을 상상해 보라. 이 이상한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는 망상증의 거대한 망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동통신 보급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엔 '게나 고둥이나' 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이 미친 기계들을 호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닌다. 요는 나도 그렇다는 거다.

대세에 반항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오는 5월에 있을 어느 공연을 위해 펀드레이징을 직접 나서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의를 앞세워 펀드지원을 부탁하는 일이 팔목 대신 수은빛 갈고리를 내밀고 다른 손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서 이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여의도 증권가 유리건물들 사이로 불어오는 초봄의 강바람은 거의 광물질적이었다.

거절받은 문 앞에서 채권가방을 든 내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어 연습장에 있는 연출가를 이어줄 번호를 찍는다. '통화' 라고 쓰인 버튼을 누른다.

찌르르르… 찌르는 듯한 전송음이 귀에서 운다. 연습장이 지하실이기 때문에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나는 여의도 증권가 거리에서 혼자서 큰소리로 말한다.

"오늘, SAIL, FAIL!"

누가 보면 나는 미쳤다. 그렇지만 휴대폰 폴더를 닫으면 오래된 연못의 수면 같은 초록색 액정에 "남쪽의 내 정원" 이라는 내 ID 문자가 풀잎처럼 떠 있다. 나는 또 혼자 말한다. 그래, 남쪽에는 나의 정원이 있어…鳴玉軒!

황지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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