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북 마셜 플랜과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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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날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들의 외국순방이나 대북선언 때마다 국내정치가 소용돌이치며 굴절돼온 현상을 목격해왔다.

DJ정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현상은 결코 사라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지역감정과 국가채무가 중요한 선거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유럽순방과 베를린 선언이 국내정치에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정치의 난맥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자연적인 탈출구는 국제정치 무대나 남북관계다. 왜냐하면 국내정치보다 성공을 거두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정치가 신뢰기반을 구축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좋은 선언이라 할지라도 대북관계는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국내지지 기반이 취약한 정부의 제의에 북한이 쉽게 호응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정책의 제일 전제조건은 국내정치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국내정치의 기반 위에 서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국내정치의 난맥상은 결국 대북정책의 영향력 감소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金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제의한 일종의 대북 마셜 플랜(?)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적 조건이 우선적으로 정비돼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먼저 지역의 벽을 뛰어넘는 화합과 신뢰의 정치가 모색되지 않으면 안된다. DJ정부 등장 이후 도덕적 오만의 '의도되지 않은(?) 병폐' 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무관심할 수도, 또 도피할 수도 없는 갈등적 구조가 사회 곳곳에 심화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이 때문에 사회 곳곳에 파여 있는 이익과 지역의 갈등적 '진지' 들을 봉합하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좋은 대북정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하나의 갈등적 진지를 만들어 낼 뿐이라는 우려가 크다.

둘째, 지나치게 물량적인 접근법에 의존하려는 대북정책의 마스터 플랜이 통일의 선언적 플랜인지 아니면 실천적 플랜인지를 보다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DJ정부가 추진하려는 대북 마셜 플랜은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베를린 선언이 만약 북한의 전폭적인 수용을 전제로 발표됐다면 그것은 지나친 경제적 모험의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이 베를린 선언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남북 동시붕괴(double collapse)' 의 위험을 내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경제적 비용의 부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일 통일로부터 얻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독일의 활성화된 민주주의와 막강한 경제력으로도 동.서독간의 심리적이고 경제적인 격차가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감정과 '나라 빚' 이 선거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마당에 과연 어마어마한 재원이 요구되는 대북 마셜 플랜을 국민적 지지하에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남북 동시 붕괴의 망령에 시달리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요구된다.

셋째, 남북관계를 국제화하기보다 민족화내지 남북당사자 관계로 전환하려는 대북 마셜 플랜의 순기능과 역기능은 면밀히 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

신뢰구축도 제대로 돼있지 않고 경제력도 불충분한 조건하에서 정상회담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대북정책을 지나치게 남북 당사자 관계와 연계시킬 경우 지난 정권들이 되풀이했던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을 가능성은 결코 배제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느긋한 국제화 전략이 시간은 걸릴지 모르나 오히려 신뢰구축이나 경제적 부담 측면에서 보다 더 바람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베를린 선언이나 정상회담 제의가 복잡한 국내정치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정권적 차원 혹은 대통령 개인적 차원의 선언적 제의로 오해돼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내건 대북선언을 과연 흡수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발표할 필요가 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이제부터라도 대북정책이 정부의 일방적인 몰이식 정책으로 계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달중<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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