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광장] 민심지표 '정치인 인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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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느 나라든 대통령 선거철이면 여론조사를 통해 민심의 동향을 파악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선 보다 정확한 여론지표가 있다.

바로 러시아 관광객들의 인기수집품이기도 한 정치인 '마트료슈카' 다.

마트료슈카는 원래 소박한 농촌 처녀 모습의 커다란 인형 속에 크기만 다른 똑같은 모양의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는 전통 공예품. 개방정책이 실시된 뒤부터 국내외 유명 정치인들의 얼굴을 담은 마트료슈카가 등장했다.

그러나 마트료슈카 장인(匠人)들은 정치인을 형상화하는 데 엄격하다. 어떤 정치인의 인형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이 한창이던 때 모스크바 최고의 번화가인 아르바트 거리에선 좌판에 진열된 '고르바초프 마트료슈카' 가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다가 고르바초프가 대중의 지지를 상실해가자 '옐친 마트료슈카' 가 새롭게 나타났다.

단명했던 고르바초프 마트료슈카와 달리 옐친 마트료슈카는 최근까지 장수를 누려왔다. 한때 공산당과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세고 옐친의 불신임안이 건의되는 등 정국이 한치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흘러갈 때도 옐친과 개혁파에 대한 민심의 지지를 반영하듯 다른 정치인들의 마트료슈카는 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말부터 모스크바 등의 기념품 가게에는 다양한 모양의 '푸틴 마트료슈카' 가 진열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푸틴을 열면 그 속엔 옐친이 있고 옐친을 열면 그 속엔 고르바초프, 브레즈네프, 맨 마지막엔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을 한 인형들이 나온다.

푸틴을 러시아제국 시절부터 현재까지 러시아를 이끈 역대 최고의 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록 대통령 선거는 치르지 않았지만 푸틴이 러시아인들의 마음 속에 이미 대통령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최고의 시사주간지 '블라스티(권력)' 도 21일자에서 푸틴 마트료슈카 사진을 통해 이번 대선 결과를 상징적으로 전망했다. 푸틴 대통령대행의 얼굴을 한 인형이 반쯤 개봉된 가운데 그 속에서 옐친 전 대통령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푸틴 마트료슈카는 얼마나 장수할 수 있을까.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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