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선거 로고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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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5때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겪은 지금 60세 안팎의 세대들에게는 노래에 관한 특이한 체험이 있을 것이다.

남침한 북한군들이 강제로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교정에 모아놓고 그들의 노래부터 가르쳤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때 배운 '김일성 장군의 노래' '빨치산 노래' 따위를 수복(收復)후에도 거침없이 불러 부모를 당황하게 하기 일쑤였다.

북한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공산주의국가들은 노래를 '대중조작' 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대중적인 음악이 정치적 선전과 선동에 효과적이라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이론을 따른 것이다.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고국을 등지고 반파시즘운동으로 일관한 브레히트는 반파시즘 세력의 의지와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선동적 노래를 만들었다. 대중적 성향이 강할수록 노래는 '운동' 의 조직을 촉진.강화하고 심화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의 반전(反戰)운동에서, 그 이후 우리나라의 학생.노동자운동에서 갖가지 노래들이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체제에는 저항의식을 과시하고 대중에게는 동류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실정치에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래가 동원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노래를 통해 정치인을 돋보이게 하고 관심을 집중케 할 수 있으니 선거판에 노래가 '약방의 감초' 처럼 등장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노래를 잔치나 놀이와 관련된 측면에서 보자면 신성해야 할 선거 분위기를 잡스럽게 만들 여지도 있다.

어차피 우리 선거판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냐고 체념해 버린다면 별문제지만 그래도 선거는 얼마쯤 진지해야 하고 그 결과가 나라의 장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선거를 빙자한 이런 저런 노래들이 거리를 휩쓰는 것은 좋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각 정당이 로고송으로 채택한 노래들만 봐도 그렇다. 머리를 싸매고 선곡(選曲)에 신경을 썼겠지만 그 곡들이 반드시 그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할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상대 당을 헐뜯기 위해 선정한 노래가 자기 당의 약점을 들춰낸 노래일 수도 있고, 자기 당이나 그 후보를 추켜세우기 위해 선정한 노래가 뜻밖에 상대 당이나 그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선거를 그야말로 잔치쯤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온다면 모를까 잔뜩 얼어붙은 국민들의 마음이 로고송으로 플어질 때는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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