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베를린 선언'이후 해야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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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독일에서 발표한 '베를린 선언' 은 기존의 정부 입장을 재천명한듯 보이지만 내용면에선 획기적 남북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선언은 두 가지 관점에서 종래 대북정책의 획기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하나는 민간창구를 통한 기업 단위의 경협에서 정부 당국간 경협으로의 직거래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남북 당국간 협의가 비료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하는 식의 소규모 부분적 접촉 단위에서 사회간접자본 건설 지원과 농업 협력 같은 대규모의 본격적 경제지원으로 선회하는 것을 뜻한다.

대북정책의 전면적 변화인 동시에 국민적 합의와 전폭적 지지 없이는 성사되기 어려운 제안이기도 하다.

이미 뉴욕에서 북.미 고위급회담 준비회담이 진행 중이고 다음달 평양에서 북.일 수교회담이 열리며, 북한이 유럽연합(EU).호주.캐나다 등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 실리(實利)외교를 전개하는 시점에서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끈다.

여기에 남북간 사전 교감이 있은 듯한 흔적도 있어 전과 달리 북측의 긍정적 회답이 있으리란 예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어느 일방의 제의나 선언만으로는 풀려가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선언이 정부 당국간의 대규모 경제지원이라는 전면적이고 정면적인 제안이라는 점에서 우리 또한 선언 이후의 대북정책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북측이 金대통령의 제안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현실화 추진의 관건(關鍵)이긴 하지만, 우리측도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만큼 부담이 큰 제안이기도 하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장기 투자를 필요로 하는 대북 지원책에서 협의 과정이나 우리쪽 여론의 합의 과정 도출도 그만큼 신중하고 충실해야 한다.

단순히 북한 땅에 공장 몇 개를 짓는다는 차원을 넘어 철도.도로.항만.전력.통신 등 시설을 두루 깔아 주는 것이라면 막대한 재원(財源)조달 방안을 포함, 과제나 절차가 버겁고 복잡다단할 것이 분명하다.

정부 일각에서는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으로부터 공공차관을 얻어 지원할 수 있다는 얘기가 이미 나오고 있다.

따라서 대북 지원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협조가 긴요하므로 정부는 지금부터 환경 정비에 나서야 하고 내실있는 구체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남북한 직거래에 따른 위험 부담을 감안한 안전장치 마련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신중하고도 공개적인 협의 과정이나 장치가 없다면 경제지원에 따른 국민적 여론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민감한 사항이다.

'베를린 선언' 은 남북한간의 장기 실천과제를 담고 있는 만큼 행여라도 정권 차원의 한건주의로 흘러서는 안된다.

만일 당장의 총선 득표에 도움이 될 구석을 살핀다거나, 정상회담의 대통령 임기 내 성사 같은 데 골몰한다면 좋은 제의가 빛을 바래고 역대 정권의 실패를 답습하고 말 것이다. 북한의 화답과 정부 당국의 치밀한 대비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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