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직도 높은 여성의 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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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해 여성의 날은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간 듯하다.

여성의 날 기념식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지나오면서 여성의 고용 불안정이 심화했음을 호소하고, 여성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계속 신장해나갈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벤처기업 20대 여사장님의 등장, 여학생들이 휩쓴 각 대학의 수석 졸업, 사법연수원에 불어닥친 여풍(女風) 등, 최근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소리에 묻혀 지내느라, 새삼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여전히 저임금과 싸우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잊고 지내왔음을 반성하게 된다.

확실히 여성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여성 내부에서 이미 '세대의 정치학' 이 부상하고 있고, 여성들간의 지위 격차나 입장 차이로 인한 이해관계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깃발만 올려도 구름떼 같이 몰려들어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던 시대, 이름도 그럴 듯한 '의식화' 시대를 거쳐온 세대로서는, "우리는 성차별 받아본 적 없어요" "저는 현모양처를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 거예요" 라며 야무지게 실익을 챙기며 돌진하는 신세대 여성을 지켜보며 세대단절의 씁쓸함을 곱씹게 된다.

그런가 하면 조직 안에서는 고졸여성과 대졸여성간의 미묘한 갈등이 전개되고, 조직 밖에서는 전업주부와 취업주부간에 미묘한 전선이 형성되면서,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 라는 해묵은 고정관념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지켜보며 서글픔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일상의 공간으로 확대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생활화에 성공했노라 자평하고 싶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카스트' 며느리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시키면서 명절문화를 바꿔보자고 주장한 것이나, '아줌마' 의 존재 가치를 고양함으로써 젊음과 미모에만 여성의 가치를 한정시켜온 기존의 시각을 보기좋게 뒤집은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의 생활화가 일상의 공간에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호주제 폐지 운동이 진행 중에 있고, 정신대 할머니를 대변하는 목소리 또한 국내외에서 쉬지 않고 들려왔다.

최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군가산점제 위헌 소송 역시 섣부른 판단은 유보해야 할 것이나, 할당제를 실시하지 않고서는 여성공무원의 불평등한 지위를 개선하기 어려운 이유가 군가산점제에 있었음을 명백하게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노라 평가하고 싶다.

물론 우리 여성들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당당하게 피켓 들고 행진할 수 있는 우리의 엄마들이, 정치 현장에서는 불과 1~3%에 불과한 여성 대표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 자신의 벽을 실감하곤 한다.

어디 정치현실 뿐이랴. 경제 현장에서의 여성 지위 또한 크게 나을 것이 없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여성의 대다수는 입직(入職) 수준(entry level)에 머물러 있고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부딪쳐 좌절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대기업 이사직의 여성은 10%를 넘지 않는다. 바야흐로 인터넷 혁명이 전개되면서 사이버 세계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이 예측불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음도 경계의 대상이다.

우리 여성의 현실이 이렇게 복잡다단할진대, 여성들간의 차이를 갈등과 분열로 인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하다.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충실히 반영해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는 일, 나아가 그 차이를 조정해 다양성의 공존으로 승화시키는 일, 21세기의 초입에 선 우리 여성들 앞에 놓인 과제라 생각한다.

함인희 <이화여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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