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견발표 금지 등 '선거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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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태국의 인기 방송사회자인 치름삭 핀통은 네 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지난 4주 동안 방콕의 번화가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녔다. 행인들에게 자신이 4일 실시되는 상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음을 알리는 홍보 전단을 나눠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왜 입후보했느냐" "당선되면 어떤 일을 할 것이냐" 등 행인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웃음만 지었다.

치름삭은 "이번 선거부터 적용되는 엄격한 상원의원선거법이 후보가 정견이나 공약을 발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후보들이 유권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은 이름.후보번호.선거일 뿐이다. 심지어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라는 말도 해선 안된다.

돈선거와 무절제한 공약 남발을 막기 위해 후보들의 선거운동을 사실상 금지한 태국의 상원의원선거법이 새로운 선거문화의 씨를 뿌리고 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지가 2일 보도했다. 이 선거법은 후보들의 신문.방송 광고는 물론 확성기를 사용한 연설도 못하게 하고 있다. 상원의원 후보들은 정당 가입도 금했기 때문에 '공천' 도 없다.

이름과 사진.후보기호만 적은 작은 포스터와 약력을 담은 전단이 유일한 선거운동 수단이다. 그나마 지역구 유권자 숫자에 비례한 일정한 분량만 사용해야 한다.

새 상원의원선거법은 1997년 당시 부패한 하원을 견제토록 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 상원에 총리.각료.고위법관 임면권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마련됐다. 당시까지는 상원이 형식적인 기구로 총리가 의원들을 임명해왔다.

그러자 각 정당은 강력한 권한의 상원이 기존 정치세력과 연결돼선 안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같이 엄격한 선거법을 마련한 것이다.

선거관리위원인 분러트 창기아이는 "언제 선거법에 저촉돼 후보자격이 박탈될 지 모르므로 후보들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고 전했다.

고톰 아리아 선관위원장은 "후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는 불만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판과 정치판을 결코 바로잡을 수 없다" 고 강조했다.

방콕의 빈민운동가로 이번에 입후보한 프라팁 웅송탐은 "때묻지 않은 새 인물들이 대거 당선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내년에 있을 하원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말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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