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조장 겉과 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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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5년 6월 13일 충남 천안역 광장. 김영삼(金泳三)정권한테 팽(烹)당한 JP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민련 유세 연단에 올라갔다.

"중앙에서 우리 충청도 사람 보고 소견과 오기가 없는 핫바지라고 그럽디다. " 주먹을 불끈 쥔 JP는 "본떼를 보여줘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 다음날부터 신문사설은 '지역감정 악용' '지역감정 부추기지 말라' 고 꾸짖었다. JP의 전략이 역풍(逆風)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6.27 지방선거 결과는 달랐다. 자민련은 텃밭인 대전시장, 충남.충북지사를 싹쓸이했다. 당시 자민련 대변인실 표현은 '핫바지 위력' .

2000년 3월 2일 충남 부여 청소년 수련원.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과 결별한 JP는 작심한 듯한 목소리로 2천여 당원들 앞에 섰다.

"영.호남이 갈린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71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호남에서 고장 사람을 당선시켜달라고 똘똘 뭉친 게 원인입니다. " JP는 주먹을 흔들면서 "동서화합의 중재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안그러면 나라가 결딴난다" 고 외쳤다.

낡은 비디오 테이프를 다시 튼 듯한 장면을 연출한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 5년 전은 방어용 수사(修辭)였다면 이번엔 '지역감정의 DJ책임론' 을 제기하는 공격용이다.

4.13총선 정국의 한복판으로 지역감정 조장문제가 등장했다. JP의 발언이 진원지지만 총선이 지역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치러질 불안한 조짐이다.

이는 여야 모두 지역감정을 핵심 득표전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당에서 그 문제를 터뜨리면, 다른 당은 그 쟁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지역감정은 동정표와 연결된다. 그만큼 민감하면서도, 취약한 이슈다.

3일 한나라당은 '지역감정은 DJ 탓' 이라는 JP의 공세를 밀어 주었다. 대구에 내려간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지역감정에 대한 1차적 책임은 金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고 주장했다.

그는 한발 더 나가 "金대통령이 지역편중인사로 지역갈등 의식을 조장했다" 고 공격했다. 한나라당은 지역감정책임론 공방을 계기로 선거판도를 민주당과의 양당 대립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민주당은 맞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감정 논쟁이 1여3야의 유리한 구도를 헝클어놓을 경우 본격적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의 호남(29곳)압승전략은 지역감정의 지원을 믿는 데서 나온다.

민국당의 '반DJ.반이회창' 전략은 기본적으로 지역감정에 의존하려는 측면이 있다.

지역감정은 역대 선거정국의 뇌관이다. 그 위력의 바탕에는 유권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2중 표심(票心)이 깔려 있다.

연세대 유석춘(柳錫春.사회학)교수는 "망국적 지역감정을 없애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투표장에 가면 연고를 따지는 게 유권자들의 오랜 투표행태" 라고 지적했다.

柳교수는 "지역감정조장 전략은 유권자의 이런 생리를 믿고 있는 탓에 나온다" 고 해석했다. 지역정치 문제를 연구한 김만흠(金萬欽.서울대)박사도 "이같은 투표성향이 지역감정에 의존해 선거를 치르려는 유혹을 받게 하는 토양" 이라고 말했다.

지역감정조장 선거를 막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 문제를 덮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들 전문가는 짜임새있고 단계적인 퇴치를 강조한다. '지역감정은 망국병' 이라고 거칠게 몰아붙이기보다, 지역감정조장 발언과 행태의 범위에 드는 정치인을 가려내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는 정보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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