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 4龍 인생역정] 빌 브래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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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빌 브래들리는 이미 대선에 출마, 패배한 적이 있다. 1960년 자신의 고교에서 열린 모의대선에서였다. 당시는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간의 치열한 대선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브래들리의 담임은 학생들에게 정치의 흥미를 돋우고자 반에서 두명을 골라 대선을 치르게 했다.

브래들리는 닉슨으로 가장했고, 재닛 비엘이라는 여학생이 케네디역을 맡았다. 급우들의 투표결과는 브래들리의 패배. ' 공교롭게도 진짜 대선에서도 닉슨은 케네디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40년전 실패를 경험삼아 브래들리는 이번에 설욕전(?)에 나섰다. 미 프로농구(NBA)스타 출신이라는 대중 이미지를 강점 삼아 고어와의 일전을 벼르고 있다.

요즘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지난해말까지만 해도 '브래들리 신드롬' 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화가 난 고어가 그의 도전을 과소평가한 선거참모를 갈아치울 정도였다. 이는 대선주자들을 통틀어 가장 많은 액수다. 화가 난 고어가 그의 도전을 과소평가한 참모를 갈아치우기까지 했다.

그의 기백은 어머니 수지로부터 물려받았다. 43년 태어났을 당시 그녀는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딸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을 억척스럽게 키웠다. 아들이 농구선수로 경기를 할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극성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판정이 석연치 않으면 "우우, 심판 엉터리" 라고 외쳐 경기 진행자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고교 통산 3천66점 대기록에 이어 대학시절인 64년 도쿄(東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영국 옥스퍼드대 석사학위, NBA 두번 우승, 상원의원 3선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이력이다.

그는 97년부터 허름한 차를 타고 다니며 강연을 하거나 스탠퍼드대 농구팀의 연습장면을 지켜보는 것으로 소일했다. 대선출마의 용트림을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마침내 지난해 9월 출마를 선언했다.

"약자를 위하고 강자에게 도전한다" 는 것이 출마의 변. '겸허한 인물' '사교계를 싫어하는 폐쇄주의자' 란 엇갈린 평을 듣지만 출사표대로 소수민족과 진보적 유권자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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