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벤처 잡아먹는 블랙엔젤 설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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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차원 그래픽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H사의 崔모 사장이 날벼락을 맞은 것은 지난해 3월. "2억원을 투자하겠다" 는 金모씨를 만나 자본금 5천만원의 법인을 설립한 지 3개월 만이었다.

당초 원하는 대로 자금지원을 할테니 사업에만 몰두하라던 金씨는 "그동안 적자만 봤다" 며 갑자기 "모든 사업권을 넘기라" 고 으름장을 놓았다.

崔사장과 직원들은 그동안 월급도 반납한 채 밤낮없이 프로그램 개발과 아이템 창출, 영업전선에 뛰어들어 회사가 이제 막 정상궤도에 진입하려던 참이었다. "투자금액을 당장 물어내든지 사업권을 물려주고 나가라" 는 金씨의 집요한 협박에 崔사장은 결국 사업권을 내주고 말았다. 자금에 쪼들린 나머지 아무 의심없이 金씨의 투자제의를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벤처기업들에 투자를 미끼로 접근해 기술정보나 물품 또는 경영권을 빼앗아 가는 '블랙엔젤' 이 벤처업계에 활개치고 있다.

이들 블랙엔젤은 특히 정부가 벤처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지난해 초부터 더욱 극성을 부려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블랙엔젤이 노리는 대상은 주로 재무구조가 취약해 금융대출이나 기관투자를 유치하기 힘든 벤처 창업자들. 매출실적이 없어 정부의 지원자금을 타내기가 '하늘의 별따기' 인데다 까다로운 담보규정 때문에 금융기관이나 창업투자회사들로부터도 대출이나 투자를 받기가 어려운 이들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다.

선점(先占)이 '생명' 인 벤처사업가들로선 단시일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블랙엔젤들의 유혹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블랙엔젤들은 창업 아이템을 도용, 정부지원금을 타내거나 유사제품을 먼저 출시하기도 한다.

인터넷 쇼핑몰 업체인 C사는 창업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내용을 인터넷에 띄웠다가 1억5천만원을 투자하겠다는 블랙엔젤에 속아 사업계획서와 자료를 팩스로 보내주었으나 돈은커녕 얼마 뒤 다른 업체가 비슷한 사업내용으로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소식만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조차 이같은 블랙엔젤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엔젤투자의 특성상 개인 대 개인으로 이뤄지는 데다 어차피 그 바닥에서 사업을 해야하는 피해자들로선 혹시 불이익이 생길까 우려해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현재 중소기업청이 파악하고 있는 엔젤투자조합 및 클럽은 전국에 모두 16곳. 하지만 이들 외에 부동산 투기나 파이낸스 등으로 번 거액을 미끼로 한 수천명의 블랙엔젤이 활동 중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매년 3천여개의 새로운 벤처기업이 생기고 있지만 솔직히 엔젤투자가 어떤 규모로 얼마만큼 이뤄지는지 알 수 없다" 며 "블랙엔젤에 의한 피해가 매년 적어도 수십억원 정도는 발생하고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박태균.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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