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쓴 일기 책으로 펴낸 주부 엄정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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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가족은 추락하는 내 인생을 구해낸 '날개' 입니다. "

희망과 절망의 양극을 선회하다 이제는 평온으로 되돌아온 한 주부가 33년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일기를 모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늘을' 이란 책을 펴냈다.

남 부럽지 않은 환경속에서 살아오다 하나 뿐인 아들을 잃고 자신도 암에 걸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엄정희(50)씨가 주인공.

그녀가 1966년부터 빠짐없이 써내려온 일기장에는 그러나 웬일인지 86년5월부터 88년2월까지 2년10개월간의 기록이 없다.

엄씨는 그 이유에 대해 "86년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성주가 체육시간에 넘어져 1년간 앓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때 충격으로 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죠. " 라고 말한다.

삼성 테스코 이승한(54)사장의 부인인 엄씨는 아들을 잃기 전만 해도 행복이 넘쳐나는 인생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경기여고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엄씨는 "너무나 순탄한 인생이었기에 그 때의 충격이 그대로 암이 된 것 같다" 고 회상한다.

88년 위암 선고를 받았지만 남편과 딸,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2년간의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낸 엄씨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한다.

"은혜는 겨울철에 가장 많이 자랍니다. 우리 인생 길에서 지나친 햇볕은 사막을 만들 뿐입니다. " 라고.

절망의 터널을 지나온 엄씨의 인생관은 '고요(靜)' 하다.

"이 세상은 하늘나라로 가는 정류장인 것 같아요. 남은 인생, 그늘진 곳을 돌아보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렵니다. "

엄씨는 인세 전액을 불우한 사람을 돕는데 쓰기로 했으며 앞으로 어린이에게 신앙과 영어를 함께 가르치는 기독교영어학교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김국진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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