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9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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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33

주문진 변씨의 집에는 놀랍게도 형식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들이 당도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걸레질해서 일행이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형식과 구면인 사람은 박봉환과 방극섭과 승희였다. 먼 여정에 시달린 여자들은, 해안도로를 벗어나 언덕배기에 있는 변씨 집에 닿은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애성바른 희숙은 따끈하게 데워놓은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를 핑계하고 턱 하니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았다.

안면도 집에 있을 땐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빽빽거리던 젖먹이가 어쩐 셈인지 출발 당시부터 쥐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깨어날 줄 몰랐었다.

떠돌지 않으면 좀이 쑤셨던 제 애비의 팔자를 쏙 빼닮아서 길을 떠나야 보채지 않는다는 언니의 말이 농담 아닌 것 같았다.

변씨 집에 도착해서 서둘러 아랫목에 뉘인 것인데, 무슨 눈치를 챘는지, 엉덩이가 송곳에라도 찔린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희숙이 서둘러 윗도리를 벗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을 곁에서 바라보던 승희는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임신할 수 없는 여자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것이 이혼으로 이어졌던 자신의 쓰라린 과거가 얼른 뇌리를 스쳐갔다.

형식이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박 속같이 흰 가슴을 넉살좋게 드러낸 채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있는 희숙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박봉환과 승희의 관계도 눈치 하나로 얼추 꿰고 있었던 그로선 그 광경을 천연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승희의 가슴도 혼란스러우리라는 것은 짐작할 만했다.

박봉환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저 희디흰 속살 때문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형식은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때 안방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며, 넓적한 방극섭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봐, 너는 여자들만 있는 방에서 싸게 나오지 않고, 워째 실없이 웃고만 있냐?" 승희도 형식을 뒤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저녁을 지어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형식도 짐작하고 영동식당 묵호댁에 저녁 식사를 주문해둔 상태였다.

영동식당에는 가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박봉환을 드잡이로 잡아끌고 집을 나섰다. 여자들에겐 손달근과 형식을 붙여 두었다. 구태여 주문진까지 달려온 까닭도 영동식당을 겨냥했었기 때문이었다.

해안도로를 덮치는 겨울바람도 만만치 않았다. 서 있으면 제출물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조업 나가지 못한 어선들이 부두에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다. 영동식당도 불은 켜져 있었으나 식탁을 차지한 술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묵호댁은 표정 관리에 혼란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박봉환과 승희가 한다리로 술청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승희를 바라보곤 울 듯하다가 박봉환을 발견하고는 새파랗게 질린 기색이었다. 그러나 낯선 배완호와 방극섭을 보고는 애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리대에는 형식이 이미 주문해둔 찌개 냄비가 끓고 있었다.

묵호댁은 곧장 승희를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짜낼 수 있는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형식이 와서 저희 집에 손님들이 들이닥친다는 말만 듣고 저녁 장만을 하고 있었는데,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손님들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네요. " 묵호댁은 울면서도 잡은 승희의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때서야 승희는 묵호댁의 안색이 파리하게 수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성이 신둥머리지고 걸핏하면 흔들비쭉이었지만, 건강 한가지는 남에게 빌려올 것이 없던 여자였다.

"안색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인사치레로 훌쩍거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승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묵호댁의 눈에서는 닭의 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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