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중앙서울마라톤] “가냘픈 아내 어디서 그런 힘 나오는지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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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중앙서울마라톤대회 풀코스에 출전한 김이수 서울남부지법원장(오른쪽)과 부인 정선자씨가 출발에 앞서 완주 의지를 다지고 있다. [김성룡 기자]

1일 오전 11시55분, 서울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 주부 정선자(55)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시선은 손목시계로 향했다. 3시간44분. 기록을 세웠다는 짜릿함도 잠시, 피곤이 동시에 몰려왔다. 눕고 싶었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제자리뛰기를 하며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10분 뒤, 50대 중년의 남성이 결승점에 도착했다. 정씨가 뛰어나가 끌어안았다. “수고했어요, 여보. 우리 둘 다 기록을 경신했어요.” 남자는 이날 열린 중앙서울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도전한 김이수(56) 서울 남부지방법원장이었다.

김 법원장이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2003년. 부인 정씨가 뛰는 걸 보고 자극받았다. 정씨는 2002년 건강을 위해 달리기 시작한 뒤 같은 해 경기도 일산에서 열린 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 출전해 완주했다. 김 법원장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고 말했다. “가냘픈 아내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하고 감동적이었죠.”

이후 김 법원장의 마라톤 인생도 시작됐다. 홀로 뛰기는 없었다. 그가 운동화 끈을 조여 맬 때면 곁엔 항상 부인 정씨가 있었다. 부인이 심어 준 용기에 힘입어 김 법원장은 5년 전 중앙서울마라톤에서 처음으로 풀코스에 도전해 완주했다. 기록은 5시간5분. 한계를 절감한 힘겨운 레이스였다. 37㎞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 걷다시피 했다. 응급차가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응원해 준 아내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뛰어 결승점을 밟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쾌감을 맛봤어요. 완주하고 나면 달릴 때 힘든 건 금세 잊고 또 달리는 게 마라톤의 미학이에요.”

올봄에 열린 마라톤대회 때도 그랬다. 김 법원장은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겐 ‘마의 벽’으로 불리는 4시간을 깨고 3시간57분 만에 42.195㎞를 완주했다. 집에 일이 있어 출전하지 못한 부인 정씨는 35㎞ 지점부터 응원군으로 함께 뛰었다.

부부의 마라톤 발 맞추기가 계속되면서 금실도 더 좋아졌다. 부인 정씨는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평생 함께하는 부부지만 나이가 들수록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에요. 얼굴 보는 시간이 늘면서 자연히 대화도 늘었어요.” 김 법원장은 “다음 대회엔 기록을 깨겠다는 기대와 설렘을 함께 나누니 마음도 더 잘 통하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마라톤의 매력에 빠진 김 법원장은 아예 전도사로 나섰다. 지난 4월 남부지법 근처의 안양천변에서 직원 300여 명과 함께 ‘한마음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지방법원 차원에서 마라톤대회를 개최한 건 처음이었다.

경기 시작 전 “오늘은 아내를 이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김 법원장은 이날 부인의 뒤를 이어 결승점을 밟았다. 그러나 그는 “내년에 또 질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함께 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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