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단체에 휘둘리는 국회…개혁입법 손 못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시민 사회단체와 이익단체들의 압박 수위가 높아가면서 국회의원들이 고유 권한인 입법권 행사를 제대로 못한 채 쩔쩔매고 있다.

대부분 단체들은 국회 법안 심의가 자신들의 이해에 맞지 않거나 개악(改惡)요소가 있다고 판단하면 관련 의원들에게 매국노를 뜻하는 적(賊)자를 붙인 뒤 낙선운동에 나서겠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숙명여대 박재창(朴載昌.행정학)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를 "정치 불신 속에 위험수위에 오른 국회 깔보임 현상" 으로 규정했다.

올 정기국회 들어 두드러진 이런 현상은 국회가 정쟁(政爭)을 일삼고 총선에만 신경을 쓰는 데 따른 자업자득 탓이기도 하나 입법권 행사가 차질을 빚어 민생.개혁 법안들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13일 산업자원위는 공공부문 구조개혁의 상징인 한국전력의 분할.매각을 허용하는 전력산업 구조개편법안을 전체회의에 상정만 한 채 심의에 들어가지 않았다.

국회 관계자는 "한전 민영화를 반대하는 한전 노조와 일부 시민단체를 의식해 여야 의원 모두 정기국회 중 민영화 문제를 다루지 않기로 담합, 관련법의 연내 통과가 무산됐다" 고 말했다.

교육위는 만 3세~취학 전 어린이를 대상으로 유아학교를 신설하면서 설립기준을 대폭 강화한 유아교육법안 개정안 심의에 들어갔으나 어린이집(한국보육시설연합회)과 사설학원측의 강한 반발로 주춤하고 있다.

변호사법 개정안도 일그러진 상태며,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국립예술대로 개칭.승격하는 국립예술대 설치법안도 본격 심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 압박 장면〓산업자원위의 박광태(朴光泰.국민회의)의원은 최근 자신을 비난하는 유인물 8만여장이 신문 간지에 끼워져 지역구에 배포됐다고 공개했다.

그는 "한전 민영화 반대 단체 명의로 된 유인물은 민영화에 앞장선 나를 포함한 몇몇의원들을 상대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고 주장했다.

전교조는 교육위 일부 의원이 개악 입법에 가담했다며 '교육 7적' 으로 규정, 낙선운동을 공언하기도 했다.

朴교수는 "이같은 현상은 기본적으로 정치권이 제역할을 못했기 때문" 이라면서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익단체들의 압력.로비를 적절히 수렴하는 새 정치문화가 시급하다" 고 강조했다.

◇ 선거에만 골몰하는 국회의원〓시민단체들의 거센 로비와 압력에 대해 의원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

대신 행정자치위에서는 마권세(馬券稅) 수입이 생기는 경마장 신설 부지를 나눠갖기 위해 부산과 경남의 경계선을 인위적으로 재조정하는 관할구역 변경법안을 통과시켰다.

최훈.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