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학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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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15면

영어 콤플렉스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외국어와 관련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많다. 본토박이와는 다른 발음과 상대적으로 낮은 토플점수를 갖고, 마치 한국인은 외국어에 소질이 없는 양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구미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가장 외국어를 못하는 이들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모국어만 알아도 살아가는 데 별 불편이 없는 이들이다. 영어나 유럽 언어와 구조가 전혀 다른 한국어로 사고하는 우리가 이만큼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사실은 큰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지금보다 더 잘살기 위해 왜 전 국민이 본토박이처럼 발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저 지금보다 외국과의 교역을 좀 더 똑똑하게 할 수 있고, 우리 문화를 외국에 잘 알려 문화강국이 될 수 있게 좀 더 효율적인 선택투자를 하면 되지 않을까.

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사실 발음은 원어민과 좀 다르더라도 필요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외국어와 국어를 잘하는 인재들이 우리 사회에는 더 필요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고전번역원 같은 기관에는 투자를 하지 않으면서, 교육의 기본도 알지 못하는 철없는 젊은이들을 단지 발음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사로 삼다 보니 현장에서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자국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연령의 아이에게 외국어 교육시킨답시고, 언어 발달 지체와 정서장애를 유발하는 무지한 조기 교육의 폐해도 크다. 대학이나 실무 현장에서 젊은이들의 발음은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독해나 작문 실력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외국어교육에 대해 차분하게 기본부터 다지기보다는 시류와 정치논리에 휩싸여 조변석개하는 교육과학기술부와 그에 따라 춤춰야 하는 교사·학생·학부모들의 고생은 슬픈 블랙 코미디 같다. 그 밑바닥에는 발음이 유창해 얼핏 자신만만해 보이는 유학파나 동포 때문에 상처받고 주눅 든 경험이 혹시 숨어 있는 것이 아닌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 완벽한 문법과 발음을 구사해야만 입을 떼겠다는 한국인의 자의식이 외국어 배우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내가 너희들 나라 말을 해 주니 고맙게 생각할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영어를 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신감도 붙을 것이다. 공부란 경쟁에서 이기고, 남에게 잘난 척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즐겁게 영어책 읽고, 행복하게 영어드라마나 영화를 즐기면 그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최근 사교육 열풍의 원흉이라며 외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특별한 외국어실력이 필요 없는 의대·법대로만 향하는 학생들을 보면 당연히 나올 만한 반응이다. 그러나 비뚤어진 사교육의 진앙지는 특정 고등학교나 대학이 아니라 노후 대책도 없으면서 내 아이만은 특별하게 키우겠다며 아이의 개성은 무시하고 돈부터 쓰고 보는 부모들의 욕심, 신성한 노동과 기능인을 홀대하는 천박한 사회분위기, 입시제도만 고치면 다 해결된다는 정치인과 교육관료의 탁상공론 탓이 아닐까.

당사자인 학생과 교사들의 의견 수렴 없이 학교의 운명을 결정하자는 발상은, 열악한 조건에서 운영되던 외국어 학교들을 일제가 일제히 폐교시켰던 구한말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한국인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외국어 콤플렉스와 일류병이 한두 달 동안 급조해 만든 대책으로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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