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Diary] 정부의 야무진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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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지식경제부는 ‘글로벌 패션 리딩 브랜드 육성사업’이라는 거창한 계획을 발표했다. 지경부에 따르면 이 계획은 2007년 수립된 ‘패션산업의 지식기반화 추진계획’에 따라 2015년까지 3개 이상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나오도록 대상 업체를 발굴해 글로벌화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한섬·보끄레머천다이징·아이올리 등 12개 업체를 선정해 패션 기업의 핵심 역량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글로벌 전략 수립 컨설팅’ ‘디자인력 향상 지도’ 등을 할 계획이다.

지경부는 보도자료에서 “패션산업은 무형의 자산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성장 유망 산업”이며 “제조업의 성장 한계를 극복시키는 전략적 돌파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내 패션산업이 영세해 해외 패션 트렌드에 대한 대응이 늦고 디자인 수준이 저조하며 소비자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는 등 성공 사례가 별로 없다”며 이 같은 계획의 필요성을 정당화했다.

‘21세기에 웬 정부 주도의 육성 전략’이냐며 외면하려 했지만 패션 담당 기자로선 흥미로운 계획이었다. 아직까지 국내 패션 분야에 이렇다 할 ‘글로벌 브랜드’가 없는 상황에서 수년 내에, 그것도 3개씩이나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분명히 야심차 보였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

선정된 12개 업체 대표 중 서너 명을 만나 축하 인사를 건네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래서 지경부에 갔더니 ‘글로벌 트렌드도 잘 모르고 디자인 인력도 아직은 수준 이하이니 더 나아져야 한다’고 충고부터 시작하더라. 해외 진출을 잘 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라고. 또 다른 업체 대표는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정보회사 사람은 해외 패션쇼에 직접 가본 적도 없고, 패션 마케팅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면서 “그 얘길 듣자마자 어떻게 이런 사람들 컨설팅을 받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이미 해외 유력 바이어들과 친분도 있고, 늘 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을 오가며 해외시장 동향을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업체 대표들도 이미 해외시장과 직접 네트워크를 탄탄히 쌓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경부가 12개 업체의 ‘글로벌 컨설팅’을 위해 내년 2월까지 주관 컨설팅 업체에 지급하는 금액은 총 7억여원. 컨설팅을 못 받아서 해외 시장 진출에 실패했다는 업체 대표는 없는데 ‘와서 교육 좀 받으라’고 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이참에 정부 관계자들도 패션 공부 좀 같이 해보려는 건가.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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