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무릎 꿇은 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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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군칠(1952~) '무릎 꿇은 나무' 전문

모슬포 바닷가, 검은 모래밭.
서쪽으로 몸 기운 소나무들이 있다
매서운 바람과 센 물살에도 속수무책인 나무들
오금 저린 앉은뱅이의 生을 견딘다
저 로키산맥의 수목한계선
생존을 위해 무릎 꿇은 나무들도
혹한이 스며든 관절의 마디들을 다스린다
곧 튕겨져 나갈 것처럼 한쪽으로 당겨진 나이테의 시간들이
공명이 가장 깊은 바이올린으로 다시 태어난다
곧게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의 뼈
그 흰 뼈의 깊은 품이
세상의 죄스러운 것들을 더욱 죄스럽게 한다



장자엔 이런 말이 있다. '곧은 나무는 도끼날을 받아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하지만 굽은 나무는 도끼날을 받지 않아 수명을 다한다' 모슬포-못살포-모래 바람 땅, 나무들도 무릎을 꿇어야 사는 땅, 척박한 제주도적인 삶, '돌.바람.여자'로 불리는 삼다(三多)의 땅, 추사도 이 굽은 소나무를 보았을까. 세한도(歲寒圖)의 배경이 되었음직한 시.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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