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주부경력 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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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아침에 고 3학년 딸과 고1 아들이 모의고사비며 간식비, 보충교재비 등으로 6만원을 달라기에 '아무 말없이 주어야지' 해 놓고도 한마디 했다. "우리집은 아침마다 돈을 찍든지 해야겠다."

아이들을 보내 놓고 집안일을 대강 마치니 오전 11시. 차 한잔을 마시며 '어디 일자리 없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고는 살림만 했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돈이 아쉬우니 절로 딴 생각이 난다.

여자 나이 45세면 '유통 기한'이 지나 식당 설거지하는 데도 안 써 준다는데…. 나도 올해 안에 취직해야 유통 기한이 안넘어 가는데….

드디어 백화점에 일자리가 났다기에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면접을 보는 담당 과장이 경력이 없어 곤란하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뜸 "주부경력 20년은 경력이 아닌가요?"라며 "그렇게 걱정되시면 일하는 것 보시고 맘에 안 드시거나 제가 못 하겠으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다. 어쩐 일인지 채용돼 교육을 받아 보니 그 과장님이 걱정했던 까닭을 알게 됐다. 내가 그동안 안하고 살았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남편이 허락을 안한다. 일하러 나가려면 집을 나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뱀.천둥번개.남편이 제일 무섭다. 그렇지만 어떻게 얻은 일자리인가. 쫓아내면 찜질방에 가서 며칠 잘 각오를 하고 일을 나갔다.

늦게 퇴근해 보니 남편이 잠들어 있었다. 휴우~. 아무튼 삐쳐서 말도 안하지만 묵인하려나 보다. 부부란 살다 보면 말을 안해도 뜻을 알아차린다.

옆의 동료는 직장을 다니다 보면 한달에 한개씩 꼬리가 나오는데 그것도 처음엔 두달이 지나야 비로소 하나가 나오기 시작한단다. 그런데 나는 석달이 지나도 안 나올 것 같다나. 게다가 사흘이 지나니 다리에 알이 배기고, 허리도 아파 죽겠는데 동료의 말이 복장이나 자세가 흐트러지면 담당 과장에게 야단을 맞는단다. 무서운 것이 하나 더 늘었다.

통영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20년 만에 일 나가는 친구가 걱정돼 꿈에서까지 보인다고…. 나는 처음 하는 일이 고달프고 다리도 아파 울고 싶었지만, 매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걱정말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서울의 친구도 전화를 했다. 고생 안해 본 내가 걱정된다면서 여자는 20대에는 미모로, 30대는 실력으로, 40대에는 인품으로 사는 거라고 파이팅을 외쳐 준다. 그래, 내 자신의 인품을 믿고, 주부경력 20년은 경력이 아니라고 하던 과장님에게 주부 힘과 인내, 자제력을 보여 줘야겠다. 성실하게 일하고 퇴근길에 맛있는 것 사들고 가서 공부하고 밤 늦게 돌아오는 아이들에게도 멋진 엄마 모습을 보여 줘야겠다.

권금주(44.충북 청주시 용암동 부영2차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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