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청와대 비서관의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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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참으로 어이없는 거짓말과 은폐조작이 우리를 망연자실(茫然自失)케 한다. 그동안 거듭해 '옷' 관련 문건을 만든 바도 없고 김태정(金泰政)씨에게 준 적도 없다던 청와대 비서관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났다. 더군다나 그가 만들어 대통령에게 올린 사직동팀의 조사보고서가 축소.은폐됐다는 일부 보도에 말문이 막힐 뿐이다.

청와대 일개 비서관의 계속된 말바꾸기와 이에 따른 연쇄적 짜맞추기식 '옷의혹' 조사가 진행돼 왔다는 사실, 각종 위증과 왜곡에 국회와 국민 모두가 우롱됐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 모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한 옷로비 사건으로 봐선 안된다. 정부의 도덕성과 신뢰성을 지키기 위한 정권적 차원에서 진상규명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청와대 법무담당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올린 문건을 축소조작했다면 그 이유와 그 문건을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 유출한 이유가 무엇인지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그로 인해 어떠한 국정운영상의 문제점이 발생됐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관이 실체와 다른 보고서를 작성한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정권담당자들은 이번 기회에 보다 냉철한 마음으로 그 원인과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란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민심동향과 공직관련 비리사건의 실체를 똑바로 파악.보고해야 하는 막중한 보좌역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실체를 왜곡하고 조작한다면 대통령의 판단이 흐려지고 국정 전체가 흔들리는 국난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 실례를 이번 옷 의혹 사건에서 우리는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번 축소.은폐가 대통령부인과 연관돼 있다는 소문을 덮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면 권력의 여전한 권위주의적 관행에 문제가 있음을 노출하는 것이며, 단순한 사적 연고에 의해 조작됐다면 이는 권력의 사적 운영의 병폐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검찰 조사도 이 보고서의 결론처럼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의 자작극으로 결론지었고, 국회에서의 청문회도 사직동팀의 조사결과를 방어하기 위한 거짓증언으로 일관했다.

처음 잘못된 각본에 짜맞추다 보니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은폐와 축소에 검찰과 집권당마저 연루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대통령과 국회가 이 거짓보고서에 놀아났으며 TV를 본 전국민이 조작극에 놀아난 꼴이 됐다.

비서관 한 사람의 거짓 보고가 나라를 흔든 셈이다. 우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의혹들이 풀려야 한다고 믿는다. 사직동팀이 사전첩보에 따라 옷 반납 독촉 등 조직적인 은폐기도를 하지 않았느냐는 의혹, 최순영씨가 조기 석방된 데 모종의 배후가 있다는 의혹들이 그것이다.

또 비서관 한 사람의 잘못된 보고가 청와대 전체의 신뢰성을 의심받게 만드는 정보점검시스템에도 문제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정부의 중대한 기밀이 연고에 따라 함부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중대한 문제다.

이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지위고하를 막론한 문책을 약속했다. 비서관 사표 한 장 받는 것으로 이 사건을 수습할 수 있다고 본다면 지극히 안이한 판단이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사직동팀의 운영 등 제도적 개선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바는 그것이 옷문건이든, 언론문건이든 의혹의 실체는 공조직 아닌 비선(秘線)조직을 가동한 데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공조직 아닌 비선조직은 투명성.공정성.책임성을 담보할 수 없다.

비선조직이란 의뢰자의 주문에 따라 정보 자체를 주문생산하거나 이번 옷 의혹 사건처럼 축소조작이 언제나 가능한 속성을 지닌다. 의혹의 진원지가 바로 이런 비선조직 탓이라는 인식 아래 대통령 보좌진.사직동팀 등의 운영과 기능이 새롭게 조정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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