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7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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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11)

"흥분되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쓸어담지 못할 막말까지 해선 안되죠. "

"이년 봐라? 보자보자 하니까 건방지게 지금 날 훈계하고 있잖아. 날 우습게 보지 말어. 나도 이 나이되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며 피눈물 흘리며 살아왔기 때문에 니 같은 년이 가면을 겹겹이 쓰고 알랑방귀를 뀐다 해도 내 눈은 못속여. 이 사람 같은 숙맥은 못 알아봤지만, 난 알아차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꺼림칙했었어. 한 보따리 챙겨 한밤중에 줄행랑놓을 도둑년 심뽀가 아니었다면 어째서 멀쩡한 거처를 두고 느닷없이 나가겠다는 거야? 호랑이 같은 내가 버티고 앉았으니까. 일찌감치 내빼는 게 이롭다는 거 아냐. 내 말 틀렸어? 틀렸다면 니 손구락은 그만두고 내 손구락에다 장을 지져라. "

"못할 말이 없네요. "

"없긴 뭐가 없어 이년아. 가슴이 뜨끔했겠지. "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애당초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네요. "

"단순 좋아하네. 서울 바닥에 니 같은 년들이 한둘인 줄 알어? 바퀴벌레 깔리듯 깔렸어. 횟집 삼년만에 사기꾼들에게 한 두번 당한 줄 알어? 니 같은 년의 심뽀를 알아차린 것도 사기당할 만큼 당하고 난 뒤에 얻은 관록이야. 나 참 더럽고 아니꼬와서 구역질이 나네. "

사태는 이미 수습의 한계를 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떠나야 할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욕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두 사람을 설복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용이라면 오히려 임시변통으로 만들어낸 거짓말이란 반격당하기 십상이었다. 욕설과 삿대질로 맞대응할 수도 없었던 승희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계약서를 주고 받았던 것도 아닌데, 그토록 혹독하게 매도당할 수는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맥주집을 나서는데, 뒤따라 나온 주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집사람이 너무 앙앙거린 것 같은데, 이해해.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세상 살다보면 판판이 실패할 거여. 남의 사정도 돌봐가면서 살 줄 알아야지. 어째서 내 꼴리는 대로만 살자는 거야?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세상에는 쌔고쌨다는 것을 알아야지. "

"미안합니다. 아주머니한테 얻어먹은 욕만으로도 배가 부르네요. 이젠 화해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가야겠지요. "

"제 발로 나가겠다는데 앙정불정 말릴 수야 없겠지만, 벌써 새벽 한신데?"

"그래도 가야지요. 챙길 거라곤 가방 한 개뿐이지만…. "

가게로 돌아가서 방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일당으로 받기로 하였던 임금을 계산해 건네주었다. 주저하다가 세어보지도 않고 가방속 옷가지 속에 끼워 넣었다. 가게를 나설 적에는 어쩐 셈인지 주인도, 그 아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고 떠나야 하겠기에 불꺼진 문 앞에서 20여분을 기다렸으나, 흡사 숨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네거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네거리 부근의 밤은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이었지만, 부근 호프집들의 불은 그때까지도 휘황하게 밝았다.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이 정류장도 아닌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네거리를 왼편으로 두고 퇴계로 쪽으로 돌았다. 문득 하반신이 휘청거렸다.

그녀를 향해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붓던 여자의 모습이 자꾸만 눈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퇴계로가 나타났다. 멀리 여관의 간판이 바라보였다. 지저분한 여관이었다. 그러나 다른 여관을 찾기엔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다.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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