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정국 새국면 돌입] 복사후 원본 놔두었을텐데…이종찬씨는 못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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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언론장악 문건' 이 복사된 뒤 유출됐다는 게 공식 확인됨으로써 검찰 수사는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알려진 것과 달리 문건의 '원본' 이 지금도 존재하거나 적어도 상당기간 국민회의 이종찬(李鍾贊)부총재 사무실에 남아 있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문건이 공개된 지난 10월 말 직후 문건을 유출한 평화방송 이도준(李到俊)기자는 "복사해 가져왔다" 고 밝혔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절도' 로 변했다. 李기자가 원본을 통째로 훔쳐 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李기자는 지난 1일 절도 혐의로 구속까지 됐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심경 변화를 겪은 듯 또다시 복사해 가져왔다고 말을 바꿨다. 이처럼 계속 바뀌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李기자가 복사해 왔다는 심증을 굳힌 듯하다.

무엇보다 李기자의 관련 진술이 무척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을 두고 있다. 李기자는 "복사기 덮개를 덮지 않아 기계에서 무척 강한 빛이 나왔으며, 이 때문에 몸을 뒤로 젖혀 작업했다" 고까지 진술했다는 것이다.

김정길(金正吉)법무부장관이 국회에서 "복사돼 유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고 자신있게 말한 것도 이같은 진술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李기자가 왜 훔쳤다고 진술했고 이후 다시 복사했다고 말을 바꿨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구속까지 감수하면서 절취했다고 주장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李부총재측과의 교감(?)이 있었거나, 또다른 말못할 사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이같은 사실은 李부총재가 문건을 봤을 개연성을 짙게 한다.

따라서 문건을 받은 지 며칠 안돼 통째로 도난당하는 바람에 李부총재에게 보여줄 겨를이 없었다는 李부총재 측근들의 주장에 결정적 의혹이 생긴다.

신원철(申元澈)비서관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들어온 문건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통째로 잃어버렸다" 고 주장해 왔다.

이런 진술이 거짓으로 최종 판명될 경우 李부총재측은 도덕적 비난과 함께 그간의 주장에 대한 신빙성 시비에 휘말릴 게 확실하다.

더불어 李부총재측이 원본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찾아낸다면 유출된 문건이 작성자로 알려진 문일현(文日鉉)씨의 작품인지 여부를 가릴 열쇠가 될 것이다.

원본에는 송신자의 인적사항, 또는 형식상 어떤 프로그램으로 작성됐는지를 판단할 근거가 남게 되는 까닭이다.

李기자가 찢어버린 것으로 돼왔던 원본이 돌연 '출현' 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휴면기' 에 들어선 듯했던 언론장악 문건 수사는 언제, 어디로 비화할지 모르는 형국이 됐다.

남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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