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고엽제' 대책 정부가 앞장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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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베트남전에만 사용된 것으로 알았던 맹독성 제초제인 고엽제(枯葉劑)가 30여년 전 우리 비무장지대에도 대량으로 뿌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구체적인 살포 결정 경위나 작업에 참여한 장병 명단 등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려 84㎢에 이르는 지역에 총 15.6t을 뿌렸다는 국방부 발표로 미루어 보면 피해자가 적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68년에만 연인원 2만6천6백여명이 살포작업에 동원됐다는 게 국방부측 발표이고, 이미 "작업참여 후유증으로 기형아를 얻었다" 는 호소까지 나왔다.

우리는 원인도 모른 채 수십년간 고통을 겪었을 피해자들을 정부가 앞장서 찾아내 치료.보상을 해주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한다. 인명이 우선인 만큼 이 과제를 놓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을 말하는 자체가 시간낭비다.

마침 베트남전 참전군인을 대상으로 한 고엽제 후유증환자 지원법도 지난해말 개정해놓은 만큼 비무장지대 고엽제 피해자도 이에 준하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문제가 왜 30여년이나 묻혀 있었는지 우리 정부와 미국측에 묻고자 한다. 어제 미 국방부는 고엽제 살포가 "한국 정부와 군부의 결정" 이라고 발표했고, 우리 국방부는 "미2사단이 최초로 고엽제 사용을 제기했고 한국군도 주한 유엔군사령부에 요청했다" 고 밝혔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자세한 살포경위, 나아가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만큼 정부는 국내문서나 외교경로 등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이번 파문은 따지고 보면 60년대말 한국에서 복무한 미군이 최근 연방정부를 상대로 고엽제피해 소송을 내 승소한 게 계기가 됐다.

노근리 학살사건도 그랬지만 '미국발(發) 폭로' 가 있은 후에야 국내도 화들짝 놀라 움직이는 행태가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인지 새삼 우리의 낮은 인권상황과 관련기록 미비를 자괴(自愧)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고엽제가 뿌려진 68, 69년은 1.21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으로 대북 경각심이 한껏 고조돼 있었고 고엽제가 무서운 독성물질이라는 사실이 미국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

성능좋은 '살초제(殺草劑)' 정도로 생각하고 별다른 안전조치도 없이 다루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더라도 정부당국은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비화한 70년대 중반 이후나 아니면 최소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90년대 초반에라도 사태파악 및 구제에 나섰어야 했다.

한편으로 그동안 "베트남전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고 공언해 온 미국측의 부도덕성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는 '1백대 정책과제' 내에 고엽제 피해자 역학조사를 포함시키는 등 비교적 전향적인 자세인 만큼 지금부터라도 진상규명.피해보상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들이 제조회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도 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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