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 바나나 한개 "그냥 드세요" 내밀던 노점상아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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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 1년여만에 서울땅을 밟을 기회를 가졌다. 외관상으로 한국은 IMF 이전과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 군데 들러본 지인들의 형편을 보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나와 막연하게 이런저런 장사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 계약직으로 바뀌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 깎인 월급으로 예전같지 않은 살림살이에 힘들어 하는 사람 등 속내는 확연히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촌 인근의 호텔에 묵고 있던 나는 어느날 아침 쇼핑하려고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네살배기 딸아이가 아무 것도 먹질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안 나는 합정역 부근에 과일을 실은 수레가 보여 다가갔다.

남은 것을 들고 다니기가 귀찮아 아저씨에게 "바나나 한 개만 파실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아저씨는 한다발의 바나나에서 한개를 뚝 잘라주셨다. 그러곤 얼마냐고 묻는 내게 "아기 먹이려고 그러시죠? 그냥 가져가세요.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졌다고 그렇게까지 삭막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다정하면서도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얼마 되지 않아도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1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찾아내 기어코 아저씨께 드리고 말았다.

그러나 호텔로 돌아오던 중 곰곰이 생각하니 동전 두개로 아저씨의 값진 호의를 희석시켜버렸다는 회한이 갑자기 뇌리를 스쳐갔다.

바나나 속살처럼 부드럽고 꾸밈없이 생기신 그분의 넓은 마음씨가 지금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나라' 에 대해 얼마나 든든함을 갖게 했는지 모른다.

그런 아저씨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훈훈한 마음들이 모여서 '대한민국' 이라는 차량의 유리창에 끼인 '경제난' 이라는 서리를 깨끗하게 녹여주리라 믿는다.

아저씨, 복받으세요!

미국 캘리포니아 가든글로브 정차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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