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하드디스크 조사] 의혹 해소하려면 문건 내용 낱낱이 공개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검찰이 12일 문일현(文日鉉)씨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교체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찾아 서울로 가지고 옴에 따라 언론장악 문건사건 수사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비밀을 간직한 '판도라의 상자' 가 마침내 열릴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물론 이 하드디스크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의 핵심인 국민회의 이종찬(李鍾贊)부총재에게 보낸 문건과 사신(私信), 제3의 관계자들과 주고 받은 전자메일 등의 내용이 훼손됐거나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 文씨가 하드디스크의 내용마저 삭제해 빈 껍데기만 남겨놓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검찰도 디스크의 조작 여부를 먼저 검증하고 있다.

그러나 잠적 기간중 심리적 압박 상태에 있었을 文씨가 그 정도로 용의주도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디스크를 복구.분석하면 그동안 탐정소설을 방불케 했던 문건의 실체가 드러날 전망이다.

검찰의 1차 관심사는 文씨가 李부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존재 여부다. 내용을 살펴보면 文씨가 난데없이 문건을 만들어 李부총재에게 전달한 이유가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李부총재는 그동안 "文씨에게 문건을 만들어 보내라고 요구한 사실이 없다" 고 주장해 왔다. 文씨도 검찰에서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편지 내용에서 '앞서 말씀하신' 혹은 '부탁하셨던' 등의 표현이 들어있다면 이런 주장은 거짓이 된다. 그런 구체적 표현이 아니어도 전체 문맥을 통해 정황은 쉽게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다. 文씨는 베이징 체류 기간중 국내 정치권 인사들과 계속 연락을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한나라당이 文씨와 정치인.청와대 비서관들과의 통화기록을 베이징에서 입수, 폭로함으로써 드러났다.

그러나 文씨가 정치인들과 단순히 전화만 주고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전자메일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내 정세에 대한 교감을 주고 받았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따라서 이를 분석하다 보면 전혀 의외의 사실이 불거져 나올 수도 있다.

야당이 주장해온대로 文씨가 제3의 인물들과 상의, 언론장악 문건을 만들었거나 李부총재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언론 문건을 보내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국민회의 李부총재가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거나 또다른 여권인사가 文씨의 문건 작성에 관련돼 있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사장의 구속에서부터 시작돼 그동안 논란을 거듭했던 정부의 언론탄압 의혹의 실체가 벗겨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언론대책 문건은 해프닝이고 정부는 절대 언론탄압을 안한다" 고 주장하던 여권으로선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다른 시나리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편지 분석을 통해 文씨가 자발적으로 문건과 편지를 李부총재에게 보냈음이 입증되는 경우다. 그렇다면 文씨가 자기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를 무엇 때문에 귀국 직전 서둘러 바꿔치기 했는지에 대해 설명이 안된다.

文씨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대한 분석은 13일 오전이면 끝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건의 실상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인 셈이다. 이 결과에 따라 현재 이강래(李康來)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고소사건의 성격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김종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