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장외집회와 진상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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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나라당이 어제 부산에서 '김대중정권 언론자유말살 규탄대회' 를 열었다. 한나라당은 다음주 중에도 수도권에서 비슷한 장외집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야당이 제기한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 의혹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장외집회라는 방법을 택한 데는 선뜻 찬동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당장의 과제인 언론문건 사태 진상규명 작업에서 장외집회가 최우선 절차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일정은 중단되었고 예산안과 산적한 민생현안 처리도 언제쯤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건사태의 진상규명을 다른 현안에 앞세우는 것은 언론자유 침해 여부라는 워낙 막중한 사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장외집회는 여당을 압박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언론문건을 둘러싸고 하루하루 긴박하게 돌아가는 지금 상황에서 택할 최적(最適)의 수단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또 자칫하면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집권여당도 야당의 장외진출에 따른 정국파행의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한다고 판단한다.

여야는 이미 지난달 29일 문건사태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그후 1주일이 넘도록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 한 일이 무엇인가. 조사위 명칭이나 조사기간, 증인채택 범위를 놓고 설전을 벌인 것밖에 없다. 여당은 문건의 작성-유통에 관련된 4인을 중심으로 증인을 최소화하자는 입장이고 야당은 문건작성 배경과 '윗선' 보고 여부, 실제 언론대책에 활용됐는지 등을 따지려면 폭넓은 증인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국민회의가 주장하는 대로 최소한의 증인만 불러서는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어렵고, 경우에 따라 현재 진행 중인 검찰수사의 재탕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권력에 의한 언론장악 시도가 있었나 없었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상규명 의지 부족 아니면 협량(狹量)탓으로 비치는 여당의 자세가 한나라당을 장외로 몰아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번 사태는 반전(反轉)의 연속이었고 관련자들의 발언에서는 일부 거짓말이 섞인 의혹이 짙게 풍긴다. 어제만 해도 이종찬(李鍾贊)국민회의 부총재가 사태를 '한 기자가 쓴 문건 해프닝' 으로 규정하고 문제의 문건을 보지도 읽지도 못했다고 거듭 주장했는데 국회가 나서서 이런 주장의 진위(眞僞)부터 밝혀야 한다.

증인범위가 문제라면 여야가 하루에 몇차례든 만나 절충을 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국정조사 의지가 어느 만큼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침 한나라당도 총무간 협상채널은 열어두고 있는 만큼 장외집회보다는 국회차원의 진상조사 성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여당이 문건사태를 어물어물 넘기려 하지 말고 의혹을 벗는 차원에서라도 협상에 적극 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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