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국의 부패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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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왕조 5백년간 공식적으로 사건화한 공직자의 뇌물수수사건은 모두 2천9백62건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건의 총계다. 언뜻 보면 많은 것 같지만 평균으로 따지면 연간 6건에 불과하다.

물론 실록에 남길 만한 중요한 사건만을 다뤘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이 정도면 부패가 극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기의 사건들이 대부분 권력을 이용한 대가 챙기기였고, 중기 이후에는 매관매직이 주류를 이뤘다는 점도 부패의 유형이 극히 한정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 숫자에 있어서나 부패의 유형에 있어서 조선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공직자의 부정부패 척결' 을 지상의 과제로 삼겠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그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니 공염불이 되기 일쑤다. 드러나는 범죄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범죄가 더 많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개방 이후 공직자들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중국은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하다.

'80년대까지의 부패는 예측 가능한 부패였으나 90년대 이후의 부패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부패' 라는 말도 오늘의 중국이 모델이다.

지난 93년 1월 중국의 관영통신조차 전국에 독버섯처럼 만연해 있는 부패를 개탄하면서 안후이(安徽)성의 경우 전체 공무원의 5분의1에 해당하는 30만명의 공무원이 지위를 악용,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큰 저택을 짓고 도박과 매춘에 탐닉하고 있다' 고 보도했을 정도다.

그래도 중국보다는 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 단체들이 조사해서 발표하는 국가의 부패지수나 공무원의 뇌물수수지수 따위를 보면 한국은 항상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자신의 병세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모르고 오래살기를 바라는 환자와 같다고나 할까. 지난 93년 초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정(司正)의 칼날을 휘둘러 겁에 질린 많은 공무원들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났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개탄했다.

"돈 좀 먹을 만큼 먹고 일 열심히 하면 그만이지. 뇌물 안받으면서 일 안하는 공무원 아무리 많으면 뭘 하나. " 그것이 뇌물문화에 길들여진 우리 국민의 보편화된 정서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99년 부패지수' 에서 한국은 96년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보여 조사대상국 99개국 가운데 50위를 차지했고, '뇌물공여지수' 에서도 세계 주요 19개 수출국 중 중국과 함께 최하위를 기록했다.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나라' 로 낙인 찍힌 셈인데 그래도 국민과 공직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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