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메이커의 편지] 열 걸음 정도 앞서가는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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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출판계의 불황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만나는 사람마다 불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 대부분은 불황의 원인을 책 읽지 않는 사회 탓으로 돌린다.

과연 그럴까□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간단하다. '독자는 무죄다' 라는 것이다.

독자란 그래도 애써 서점을 방문하고, 많은 책들 앞에서 고민을 하고,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내며 행간의 의미를 더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독서량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해서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일일 권장량을 정해 성적과 인사고과에 반영할 수는 더더욱 없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책은 팔리고 시덥잖은 책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로 간다. 다만 독자의 욕구가 변하고 있을 뿐이다.

불황의 원인에 대한 혐의는 그러니까 저자와 기획자의 민첩하지 못한 감각에 있다. 저자와 기획자들의 안목과 상상력이 시대의 흐름을 한발 뒤에서 허둥지둥 쫓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적시에 필요한 책을 공급하는 일은 독자들보다 열 걸음 정도 앞서갈 때 가능하다.

열 걸음이란 거리는 양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리이고 서로 동행임을 확인할 수 거리이다. 독자는 수용자이므로 저자와 기획자는 반드시 앞서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 거리가 오십보 정도라면 이미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과 동행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독자는 곧 옆 골목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동행의식과 의사소통, 정확한 거리조정은 기획의 핵심이다. 지나치게 독자와 밀착된 기획은 독자의 지적 상승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졸속이 되기 쉽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거리에서의 기획은 독자를 무시한 자기만족에 불과한 기획이 되기 쉽다.

어떤 미적대상을 표현한다고 할 때, 부족한 거리조정(under-distancing)은 신파가 되고 초과한 거리조정(over-distancing)은 현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에는 이미 흥미롭고 유익한 공짜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출판물이 일정한 환금가치를 지니기 위해선 공짜 또는 싸구려 정보 이상의 흥미와 유용성, 정서의 울림을 담보해야 한다.

멀티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문화의 가속도를 출판종사자들이 장악하지 못한다면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며, 새로운 독자의 창출은 독자 자체를 쫓는 것에서가 아닌 문화의 속도를 쫓는 일에서 가능할 것이'다.

정해종(시인.해냄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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