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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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23)

여기가 팡촨 근처에 있는 잠행로 초입 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옌지를 떠난 승용차가 북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짐작이 제대로 들어 맞았다면,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 부근까지 달려 왔음직했다.

그러나 기왕에 납치당한 처지라면, 국경선 근처이거나 깊은 호젓한 두메 산 속 어디거나 태호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뒤뚱거리며 시달림을 받던 승용차가 뚝 멈춰 섰다. 두 사내가 태호를 밖으로 끌어내 등을 쳐서 걷게 만들었다.

바람에 스친 나뭇잎들의 떨림과 냇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산했다. 수림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가슴 속으로부터 결연한 비장감이 엄습해 왔다. 세 사람을 하차시킨 승용차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승용차를 숲 바깥에 있는 한길까지 몰고 나가 초계(哨戒)를 펴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겁에 질린 운전사가 냅다 줄행랑을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와 마지막 협상을 가질 여지는 있었다.

어떻게 할까. 양단 간에 해답을 얻어낼 수 없으면서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눈물이 오줌 같이 흔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사내들은 태호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오금을 꿇렸다.

등 뒤로 두 발짝쯤 뒤로 인기척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5,6미터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이 숲 속에서 무얼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과 함께 태호는 진저리를 쳤다.

승용차를 운전했던 조선족 사내의 행방이 의문이었다.

한길 쪽으로 차를 몰고나간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낌새가 없었다.

패거리와 협상을 벌이자면, 반드시 그가 곁에 있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꽤나 흘러간 뒤까지 그가 돌아왔다는 조짐은 없었다.

시종 근처를 배회하는 두 사람의 발길에 차이는 낙엽소리만 들려왔다.

아주 차갑고 예리한 전율이 태호의 가슴 속을 휘젓고 지났다.

상식적인 예측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두 사람의 관심이 태호에게 쏠려 있지 않고 다른 무엇에 있다는 것이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그러나 조선족 사내가 되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것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싶었다.

태호는 비로소 꿇어앉은 상태에서 땅에다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뀌면 앞 쪽의 시트를 이마로 찧으라던 운전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우선 눈을 가린 안대나마 풀어주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 안대를 풀어준다면, 귓가를 스치며 흘러가는 작디 작은 바람의 소리들까지 식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이 안대만은 풀어달라는 그의 애끓는 호소가 두 패거리들의 시선에 들기를 바랐다.

협상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대로 쏴버리겠다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 할지라도 안대만은 풀어주는 아량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두 사내들로부터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말소리조차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일순 몸뚱이가 땅 속 깊숙한 곳으로 스며든 것처럼 사위는 바람소리조차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비장감에 태호는 몸서리쳤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둔기로 잔허리께를 얻어맞은 듯했다.

사뭇 꿇어앉은 자세를 유지하였던 그의 몸뚱이가 나무토막처럼 풀섶 위로 엎어졌다.

빽빽하게 들어선 자작나무 등걸 뒤에서 태호를 겨냥하고 있었던 사내가 주저하던 발사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태호가 쓰러진 뒤에도 연달아 두 번의 확인사살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쓰러진 태호는 미동도 없이 풀섶에 콧등을 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발포 당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작나무 사이를 빠져 한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를 지켜보던 다혈질의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확인사살까지 끝낸 태호의 시신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동안 미동도 없이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숲 바깥에 있는 한길로부터 트럭 한 대가 덜커덩거리며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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