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동구] 2."자존심 구긴 개혁·개방 8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91년 12월 24일. 크렘린의 첨탑에서 공산주의의 조종(弔鐘)이 울리던 날, 옛 소련 곳곳에서는 군중들이 모여 도시 중앙에 자리잡은 레닌 동상의 목에 밧줄을 걸고 '공산체제 건설의 아버지' 를 끌어내렸다.

보리스 옐친 등 개혁파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8년. 용케 살아 남았던 몇몇 레닌동상들엔 다시 꽃이 바쳐지고 있다.

친공산주의 시위대도 자주 등장한다. 레닌과 비슷한 분장을 한 사람들은 "똥 같은 자유주의.민주주의가 가져온 것은 강대했던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 인민의 자존심을 구긴 것밖에 없다" 고 외친다.

끝을 모르는 경제난과 늘어만 가는 빈부격차, 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들보다 많아진 권력자들이 8년 동안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러시아인의 배를 더 곯게 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첼랴빈스크시 일부 학교에서는 91년 이후 교과서에서 사라졌던 레닌 등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교육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해 12월 5일엔 국가두마(하원)가 소련비밀경찰(KGB) 창시자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을 원위치에 복구하자는 일부 의원의 제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통과시켰다.

이미 러시아연방 89개 지역 중 최소한 43개 지역은 친공산당.민족주의계열의 주지사 시장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스크바대학생 막심(21)의 말처럼 "공산주의로의 회귀는 싫다.

하지만 일부 재벌들의 배만 불려주는 무기력한 현정부보다는 강력한 지도력을 지녔던 스탈린이 더 낫다" 는 게 보통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다.

KGB 출신의 프리마코프 전총리, 공산당수 주가노프, 권위주의적 통치자 루슈코프 모스크바시장 등 결코 민주주의적 지도자라고 볼 수 없는 인물들이 유력 대통령 후보 1, 2, 3위를 차지하는 것에서 그런 국민들의 바람은 가감없이 읽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