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말 안듣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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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정치상황을 보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이제 모든 일을 '정상적' 으로 해야겠구나 하는 점이다.

원칙에 어긋나거나 비민주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국가를 이끌기도 힘든 상황이 빠르게 조성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과거 같으면 순순히 따라오고 눈만 찡긋해도 알아서 기던 사람들이 반발하고 불평하고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말 안듣는' 현상이 각계 각조직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당장 정치권을 보라. 보스의 눈치를 살피고 점수따기에 열중하던 정치인들의 입에서 '오너체제를 극복하자' '당운영을 민주화하자' '공천권을 국민과 당원에게 돌려라' 하는 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여야의 구별도 없다.

당총재직을 아예 없애자는 소리까지 나온다.

여권신당 (新黨) 을 만드는 원동력이 누구인데 그 신당에서 DJ색깔 희석이니 1인지배체제는 안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예사로 하고 있다.

검찰에서도 이미 부분적으로 '말 안듣는' 현상이 나오고 있다.

검찰이 경기도지사 부부를 구속한 얼마후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임창열 (林昌烈) 지사의 구속은 막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됐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미루어 검찰은 대통령의 뜻과 달리 林지사를 구속했던 모양인데 과거엔 생각도 못할 일이다.

검찰은 그 후에도 '외부의 뜻' 을 무시하고 현대증권의 이익치 (李益治) 회장을 구속했다.

검찰내의 이런 '말 안듣는' 분위기는 그리 간단히 볼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요즘 말썽많은 도청.감청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런 일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말썽이 크게 된 적은 없었다.

과거엔 모두 찍소리 한번 못하고 쉬쉬하며 그냥 넘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이 못참는 것이다.

도처에서 항의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더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재계도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얼마 전 막강한 재경부장관이 참석한 세미나에서 어떤 기업인이 정부가 너무 노동 편을 든다는 불만을 제기해 장관과 공개적으로 입씨름을 벌였다고 한다.

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요컨대 이제 원칙대로, 정상적으로 하자, 내 조직 내 권리는 지키겠다는 목소리가 사회각계에서 쏟아지는 상황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 끌려가고 따라가던 과거관행을 더 이상 못따르겠다는 움직임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높아지는 것이다.

권력자.오너.고위층.책임자들로서는 정말 골치 아프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민주의식.권리의식이 높아지고 과거의 권위주의적 관행을 극복하려는 에너지가 축적된 데서 나오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집권측이나 정부도 이런 현상을 나쁘게 봐선 안될 것이다.

오히려 정말 개혁을 하자면 이런 에너지야말로 개혁추진의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다.

가령 정부가 말 안듣는 검사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영전까지 시킨다면 검찰개혁의 가장 핵심이라 할 검찰중립화는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말 정치개혁을 바란다면 그 핵심인 정당민주화를 하자는 자생적인 목소리를 진정으로 반겨야 할 것이다.

이런 '말 안듣는' 현상에 대응하는 정권의 자세를 보면 진정한 개혁의지 여부를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강압적으로 대처한다면 개혁의지라는 게 수상쩍게 비칠 뿐 아니라 마찰.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미 정상적으로 하자, 원칙대로 하자는 의식과 에너지는 형성되고 있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막으려면 성공하기도 힘들고 사회적.정치적 대가와 고통도 클 것이다.

지금 각 정치세력들은 오직 내년총선의 승리만 생각하고 신당이네, 합당이네, 제2창당이네 하고 온갖 작전을 짜고 있지만 정말 승리를 바란다면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할 것이다.

사회 각분야에서 과거엔 통하던 방식이 이젠 통하지 않는 시대로 가고 있다.

조직은 조직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각자의 논리와 권리를 원칙대로, 정상적으로 찾고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아직은 '말 잘듣는' 조직에서도 머잖아 그런 소리가 나올 것이 틀림없다.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유도하고, 내 편을 만들고, 보복하고, 제거하고 굴복시키려 하고, 상황을 왜곡.호도.위장하고 이중인격과 일구다언 (一口多言) 으로 사람을 속이고 하는 시대는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이젠 정상화로 대처해야 하고 정상화 외엔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송진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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