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부끄러운 日TV 베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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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3년 동안의 도쿄 (東京)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함께 귀국한 유치원생 아들이 "이것, 다 본 거잖아" 하며 TV를 꺼버리는 사례가 한두번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국영방송국인 KBS의 최고 인기 만화영화 '요리왕 비룡' 은 일본의 '주카 이치방 (中華一番)' 을 수입한 것이다.

한 잡지가 조사한 만화영화 인기순위를 보자. 2위인 '짱구는 못말려' 는 일본 '크레용 신짱' 이고, 3위인 포켓몬스터는 아예 제목까지 그대로 베꼈다.

4위의 '캐드캡터 체리' 도 일본의 '캐도캡타 사쿠라' 를 제목만 살짝 손질한 것이고 5위인 '사자왕 가오가이거' 도 일본수입품이다.

조사된 인기순위 10위까지 일본 만화영화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아직 극장에 공개되거나 한국판 비디오가 출시되지도 않은 '엑스' 가 당당히 8위를 차지한 대목에는 기가 막힐 뿐이다.

"아빠, 그런데 왜 저기에 태극기가 달려있지?" .아들의 질문에 가슴이 뜨끔하다.

방송국 친구 말로는 일장기는 태극기로 바꾸고, 게다 (일본의 나막신)가 등장하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적당히 운동화로 바꾼단다.

심의 통과를 위해서. 30분짜리 한편을 직접 만들면 1억원, 수입하면 1천만원도 안되는 비용문제가 있다지만 해도 너무하다.

시골 노인들 퀴즈대회나 1주일 동안 제시된 과제를 완수하면 상품을 주는 프로, 옥상에서 고교생이 고래고래 고함치는 시합 등 모두 일본에서 본 너무 낯익은 장면들이다.

도쿄에서 만난 NHK의 해설위원은 "일본방송은 미국.유럽을 너무 베낀다" 며 부끄러워했다.

그는 아마 한국TV는 한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곧 일본 민간방송들이 위성방송을 시작한다.

한글로 볼 수 있는 동시 번역 소프트웨어도 완성되기 직전이다.

앞으로 우리 TV가 애국가로 시작해 애국가로 끝날 때까지 뉴스 말고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때울지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걱정부터 앞선다.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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